길에 둔 물건 치웠다고 개인이 배상?... '내리 갑질'에 우는 환경미화원

입력
2024.01.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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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 중 생긴 손해 미화원이 물어줘야
업체, 재계약 압박에 민원 죄다 떠넘겨
지자체도 모르쇠..."근무환경 고려해야"

서울의 한 구청과 계약을 맺은 생활폐기물처리업체 소속 환경미화원 A씨는 지난해 겨울만 생각하면 아직도 억울하다. 그는 미화 작업을 하다 주민이 차량을 빼러 자리를 비운 사이 도로변에 내려놓은 짐 꾸러미를 무단 투기물로 오인해 폐기했다. 해당 주민은 짐에 유명브랜드 옷이 들어 있었다며 수백만 원의 배상을 요구했는데, 구청과 업체는 나 몰라라 하며 모든 책임을 A씨에게 떠넘겼다.

더우나 추우나 야외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환경미화원이 싸워야 할 대상은 날씨만이 아니다. 일하다 문제라도 생기면 미화원이 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는 “업체 내부의 일”이라며 선을 긋고, 용역업체도 “개인의 잘못”이라면서 발을 빼기 일쑤다. 책임도 하청하는 ‘내리 갑질’에 청소노동자들이 신음하고 있다.

구청은 업체 책임, 업체는 개인 책임

A씨 사례가 그런 경우다. 사고 당시 짐 주인이 가장 먼저 찾은 구청은 업체에 알아보라고 했다. 구청 관계자는 통화에서 “배달음식을 치우는 등 유사 사례를 살펴보니 하청업체나 미화원 개인과 협의해 왔다”며 “구청 차원에선 할 수 있는 조치가 적다고 판단해 동일하게 적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업체는 짐 주인의 배상 요구에 별 고민 없이 A씨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물론 당사자의 동의는 구하지 않았다. 업체 측은 “개인의 판단 착오에 의한 사안으로 관행대로 처리했다”는 입장이다.

이런 배상 책임 전가는 청소 업계에선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32년 차 환경미화원인 장경술 한국노총 민간위탁분과위원회(환경미화원 노조) 의장은 “암묵적이지만 청소노동자가 겪는 아주 흔한 갑질”이라고 설명했다.

책임을 직접 떠넘기는 방법만 있는 게 아니다. 각종 교묘한 방식이 동원된다. 서울의 한 용역업체는 수거 작업 중 딱딱하게 굳은 음식물이 떨어져 주차 차량에 흠집이 나자, ‘협의’를 가장해 해당 미화원이 사비로 20여 만 원을 배상하게 했다. 일단 업체가 배상한 뒤 구상권을 청구해 급여에서 차감하는 사례도 노조에 비일비재하게 접수된다. 최미숙 노무사는 “고의성이 없을뿐더러 근무 중 발생한 사안은 기업의 책임인데도, 노동법상 노동자 보호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원청' 지자체도 노동 민감도 키워야"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화원들은 시간 맞춰 청소하기도 벅찬데, 심적 부담까지 떠안아 스트레스가 배가된다. 여기에 업무와 관련된 배상보험도 없어 마음을 졸이며 일하는 게 일상이 됐다. 인천의 한 구청과 계약한 업체 소속 50대 환경미화원은 “특히 시야가 나쁜 야간작업 때는 착오로 택배를 들고 가거나 주차된 차량을 긁을까 더 조심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업체도 업체지만 환경미화원의 고통에 손 놓은 원청(지자체)을 향한 불만도 적지 않다. 장 의장은 “지자체와 재계약을 따내기 위해 잡음을 최소화하라는 업체의 압박이 직원 개인에게 전가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민원이 나오지 않게 적은 인력으로 바삐 움직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데 열악한 업무 환경은 고려하지 않은 채 책임만 묻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항변이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윤 목적의 일반적 노사관계와 달리, 공공부문은 하청업체 노동환경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지는 편”이라며 “원청으로서 지자체가 미화원들의 어려움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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