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암살·미인계… '황소의 난' 마을에 여성 비밀요원 양성소

입력
2024.01.13 10:00
<130>절강고진 ②청양고촌과 입팔도고진

2009년 5월 마오쩌둥의 장손 마오신위가 저장성의 한 시골을 찾았다. 마오쩌둥의 고향은 서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후난성 사오산(韶山)이다. 현역 군인인 손자가 고인이 된 할아버지의 원적지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언론은 대서특필했다. 천년고촌이자 모씨 집성촌이다. 항저우 서남쪽 300km 거리의 청양고촌(清漾古村)으로 간다.

강남모씨 발상지, 마오쩌둥 조상 마을


걸출한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후스가 쓴 청양(清漾) 패방이 반겨준다. 시골 구석에 대학자의 필체가 있다니 놀랍다. 강남모씨 발상지, 마오쩌둥 조거지(祖居地)라는 설명도 있다. 마을 초입에 돌로 만든 족보가 있다. 동치기사년(同治己巳年)이니 1869년에 편찬됐다. 뒷장에 ‘택동(澤東)’도 보인다. 1893년인 광서십구년(光绪十九年)에 출생했다는 기록이다. 남북조 시대인 6세기 중반 모원경이 가족을 이끌고 처음 정착했다. 그의 호가 마을 이름이 됐다.

강남의 손꼽히는 명망가로 유명한 마을이다. 오늘날 장관직인 상서(尚書)를 8명이나 배출했다. 80명이 넘는 인재가 진사를 통과해 관리가 됐다. 역사가 오래됐다고 모두 명문 대갓집이라 부르진 않는다.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을 모씨조사(毛氏祖祠)가 보인다. 이중 처마로 솟은 정문과 나무와 벽돌, 돌로 조각하고 치장했다. 줄줄이 걸린 홍등과 좌우 쪽문 앞 궁등(宮燈), 두 겹으로 세운 기둥과 대련도 잘 어울린다.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본당이다. 합경당(合敬堂)에 걸린 백구도강도(白龜渡江圖)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청양모씨의 모태인 시조 모보(毛寶)의 군장 차림이다. 4세기경 동진(東晉)의 장수다. 전투 중에 거북 등을 타고 강을 건너 목숨을 구했다는 전설이다. 그림 양쪽에 대련이 나란히 걸렸다. 구불구불하고 아리송하지만 볼수록 아름다운 서체다. 은혜에 보답하는 충성스러운 동물(龜渡酬恩精忠動物) 거북과 서로 긴밀하게 협조해 정성을 다하니 하늘도 감동(魚密應釣至孝格天)한 물고기에 대한 찬양이다. 시조에 대한 존경이며 집안의 자랑스러운 상징이다.


뒤로 돌아가면 추원당(追遠堂)이 나온다. 거의 1,500년 역사를 지닌 가문이니 수없이 많은 신위가 도열해 있다. 시조부터 시작해 역대 고관대작의 명성도 기록하고 있다. 양쪽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니 시대에 따라 복장과 장신구가 다르다. 문관과 무관도 구분된다. 편액도 사방에 걸렸다. 충성이나 효도, 과거 급제나 재상 승진으로 현란하다.

마당에 공연 무대인 희대(戲臺)가 있다. 인생살이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복록수(福祿壽)를 관장하는 삼성(三星)이 보인다. 여의와 조롱박을 안고 있고 복숭아를 든 동자까지 해학이 넘친다. 무대에 걸린 의관풍아(義關風雅)는 청나라 말기 군인이자 정치가인 증국전이 산시성(山西省)의 한 거상에게 써준 글이다. 뜻이 좋으니 가져다 썼다. 의로운 집안에 인문의 향기가 아름답다는 뜻이다. 사대부나 상인이나 무대를 두고 문화를 즐기는 일이 어찌 풍요롭지 않겠는가?


무대로 올라가 천장을 바라보니 도교의 팔선(八仙)이 화려한 몸짓으로 등장한다. 태극과 팔괘인 듯 신비로운 기운이 풍긴다. 중앙의 원에는 한 쌍의 학이 놀고 팔선이 저마다의 풍모를 띠고 자리 잡고 있다. 바깥 네 귀퉁이에는 박쥐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바닥에 누워 도교 인물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무대 벽면에 그린 장군도 보인다. 거북 등을 타고 칼을 들고 수염을 휘날리며 강을 건너는 모습이 늠름하다.

사당 안에 마오쩌둥 진열관이 있다. 다리 꼬고 앉은 동상 뒤로 황산의 일출과 절경을 그린 그림이 보인다. ‘강산이 이다지도 어여쁘구나!’라는 강산여차다교(江山如此多嬌)의 필체도 선명하다. ‘마오체’라 해도 될 정도로 개성이 강해 바로 알아본다.

머리 위에 지쟁조석(只爭朝夕)이 뜻밖이다. 1963년 정치가이자 문학가인 궈모뤄의 글을 읽고 화답한 ‘만강홍(滿江紅)’에 나오는 말이다. 긴박한 시기에는 최단 시간에 모든 역량을 쏟아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소 강박이 느껴지지만 어쩌면 마오쩌둥의 인생을 잘 드러낸 표현일지 모른다. 열혈 추종자가 아니면 그의 일생에 등장하는 인물 사진과 자료, 서체, 책자를 다 둘러보기가 부담스럽다.

사당을 나와 마을로 들어선다. 마두장이 촘촘하게 붙은 저택이 나온다. 담장이 겹겹이 쌓인 골목을 들락거린다. 청양조택(清漾祖宅) 앞에 선다. 모씨 문중이 최초로 정착해 거주한 장소에 2003년 중건했다. 입구에서도 봤지만 유명한 문학가이자 철학자인 후스의 필체가 선명하다. 민국 시대인 1933년에 썼으며 낙관도 있다. 단정하면서도 간결한 글씨가 대가의 솜씨다. 산골 오지까지 와서 직접 썼다고 하니 연유가 있을 법하다.


후스는 대학자 마오쯔수이의 초청에 따라 이곳을 방문했다. 둘은 절친이었다. 고거가 바로 부근에 있다. 중국 근대의 5·4운동 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애국과 진보, 민주주의와 과학적 사고를 지향했던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천자문은 물론 사서와 좌전을 통달하고 1919년 5·4운동 당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다. 후스와 이념을 함께한 동지였다. 비록 낡고 진품은 아닐지라도 책상에 놓인 붓 몇 자루에서 선구자의 숨결을 맡아본다.

황소의 민란으로 개척된 마을

청양고촌을 나와 남쪽으로 향한다. 우뚝 솟은 강랑산(江郎山) 봉우리가 오랫동안 시야에 머문다. 2010년 8월 유네스코가 중국 전역의 단하지형(붉은빛을 띠는 암석 지대) 6곳을 묶어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 그중 하나다.

지금은 4차선 도로지만 옛날에는 험난하기로 유명한 선하령(仙霞岭)이 가로막고 있었다. 당나라 시대인 878년 황소의 민란 군대가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이동했다. 수십만 명이 움직였으니 자연스레 고갯길이 열렸다. 70km에 이르는 선하고도(仙霞古道)다. 북송 왕조가 44개의 마을을 조성했다. 28번째 마을인 입팔도(廿八都) 고진으로 간다.

약 1시간 동안 선하고도를 달린다. 입팔도 마을을 알리는 표석 첫 글자가 얼핏 '입 구(口)'처럼 보인다. 실제는 20을 의미하는 넨(廿)이다. 고대에 아라비아 숫자를 표기하던 한자다. 30은 싸(卅), 40은 씨(卌)인데 현재도 가끔 사용한다. 50은 웨이(圩), 60은 위엔(圓), 70은 진(進), 80은 쿠(枯)라 썼다. 지금은 실생활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90은 따로 없다. 흥미롭게도 100을 붙여 쓴 비(皕)는 200이다. 입구 바위를 지나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을 휘감는 도랑 옆에 황토 담장과 검붉은 기와집이 보인다. 마을 안에도 마두장이 높이 솟아 있어 골목이 좁아 보인다. 예로부터 저장에서 푸젠과 장시로 이동하는 길목이다. 성황을 이루며 1만 명이나 살았다. 교류가 잦아 상업이 발달하니 이주하는 주민이 많았다. 지방 사투리가 9종류나 섞여 방언왕국(方言王國)이다. 성씨도 130개에 이를 정도여서 백성고진(百姓古鎮)이라 불린다. 번창한 마을답게 관광지로 변해 별의별 가게와 식당이 많다.

풍경, 꽃다발, 도자기피리, 호루라기 파는 가게의 문구가 재미있다. 중국어로 깎아준다는 말은 ‘다저(打折)’다. 애국하면 깎아준다고 쓰여 있다. 아래 문장에 애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적었다. 엑스(X)로 표시해 시선을 붙잡는다. 한자는 같지만 발음이 서로 다르다. 위는 ‘zhé’, 아래는 ‘shé’로 읽으라고 써놓았다. ‘다서’라 읽으면 밑지고 손해 본다는 뜻이다.

현대사의 질곡인 문화혁명 구호도 많이 남아있다. 민국 시대에는 국민당 비밀 요원을 양성하던 장소였다. 애국이 이슈가 될만한 마을이다. 비밀 요원인 특공(特工) 양성소가 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공산당 및 일본 특무와 대결하기 위해 첩보 조직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국민정부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이다. 간단히 줄여 군통(軍統)이라 부른다. 악랄하고 교묘해 악명을 떨쳤다. 저택을 아지트 삼아 여성 특공만 훈련시켰다. 군통 총책임자 다이리의 고향과 불과 20km 떨어져 있다.

다이리와 여성 특공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피비린내 나는 첩보전에서 맹활약한 인물이 많이 전시돼 있다. 미인계는 물론이고 정보 수집과 요인 암살에 투입된 여성 특공의 활약상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암호 훈련이나 복장, 고문 기구, 권총도 있다. 다이리는 공산당과 내전 중이던 1946년 3월 칭다오에서 난징으로 향하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주민이 많으면 종교는 상설이다. 관음전과 관제묘를 비롯해 민간신앙까지 겸비했다. 대체로 작은 규모다. 공자를 봉공하는 문창궁(文昌宮)은 몸집이 크고 휘황찬란하다. 양쪽으로 솟은 겹처마지붕이 층층이 쌓였다. 비첨은 날개를 펼친 듯 화려하다. 들보와 도리, 기둥은 섬세하고 품위 있는 공예로 꾸몄다. 용과 봉황, 새와 꽃을 조밀하게 새겼다. 생도를 가르치는 공간이다. 스승이 뒷짐 지고 ‘공자 왈 맹자 왈’ 하니 공부하기 싫은 아이는 얼굴을 찡그린다. 공자행교도는 근엄하고 학당 분위기는 유머러스하다.


선하고도를 무대로 이익을 남긴 거상이 있다. 청나라 말기와 민국 시대 상인 강우홍이다. 저택 대문에 신화 동물이 조각돼 있다. 아주 탐욕스러워 눈에 보이는 물건을 먹고 또 먹어 치운다. 양이 차지 않자 태양까지 삼키려 했다.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려는 계탐도(戒貪圖)다. 위로는 물병에서 수양버들이 뻗어 나와 예쁜 문양을 이루고 있다. 장수를 염원하는 남극성휘(南極星輝) 양옆으로 송죽(松竹)과 매란(梅蘭)이 어우러져 있다. 거상의 품위를 드리운 조각품에 눈을 뗄 수 없다. 담장에 남은 세월의 흔적도 매력이 넘친다.

강우홍은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은행 업무를 담당하는 융흥전장(隆興錢莊)이다. 대문을 자세히 살피면 깊은 뜻을 새겼음을 볼 수 있다. 노자가 말한 ‘상서의 기운과 함께 성인이 동쪽에서 온다’는 자기동래(紫氣東來)는 복으로 치환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재물이다. 바로 옆의 양쪽 까치발에 초재동자(招財童子)와 진보낭군(進寶郎君)을 조각했다. 초재진보는 상인이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하나의 글자로 합체해 표현하기도 한다. 바깥쪽 까치발에는 수성(壽)과 복성(福)이 복숭아와 여의를 들고 있다.


맷돌로 갈아 만든 두부가 입팔도 고진의 별미다. 두부 축제를 할 정도로 유명하다. 식당에 그려진 그림만 봐도 군침이 돋는다. 두부전골이 38위안(약 6,500원)인데 두 사람 먹기 딱 좋다. 고소하고 담백한 두부에 돼지갈비와 죽순이 합류한다. 식지 않도록 숯불 위에 올려놓고 먹는다. 시간이 지나면 진하게 우러난다. 술안주로 제법 훌륭하다. 주거니 받거니 끝도 없다. 육수를 더 넣어도 된다. 인기척이 줄고 홍등이 비추니 몸과 마음도 따뜻해진다. 골목 색깔만큼 진한 국물이 발품의 노고를 어루만진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