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실학자 박제가의 백화보서(百花譜序, 1785)는 '백화보'라는 꽃 그림책 서문으로 쓴 글이다. '백화보'의 그림은 당시 꽃에 심취해 미쳤다는 소리를 듣던 젊은 화가 김덕형이 그렸다고 하는데 백화보서에서는 그를 '김군(金君)'이라 부르고 있다. 김군은 꽃밭을 만들고 하루 종일 꽃을 보며 몰두하는 병에 가까운 습관, 즉 벽(癖)을 가졌는데 많은 이들이 그를 미친놈이라 비웃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제가는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전문성을 익히는 것은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며 김군의 재능을 인정하고 두둔한다. 김덕형의 화벽(花癖)은 '미쳐야 미친다'는 금언의 실제 사례로 인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쉽게도 현재 백화보의 행방은 묘연하다. 어쩌면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조선 후기 외침과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어 외국 어느 박물관이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을지 모른다. 백화보는 꽃을 그린 화첩일 가능성이 크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도감일 수도 있어서 꼭 확인해 보고 싶은 책이다.
백화보서의 김군과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 1814)에 등장하는 '창대(昌大)'라는 젊은이의 이미지는 묘하게 일치한다. '창대는 성품이 차분하고 꼼꼼하며, 자연물을 세밀히 집중해서 살펴 성질과 이치를 파악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신뢰했다'는 정약전의 자사어보 서문과 박제가의 백화보서는 당시 실학자들의 공통된 자연관과 인식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모 일간지에서 김덕형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는 꽃 그림 두루마리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잘 그린 16종의 꽃과 나무 그림 위에 표암 강세황을 비롯한 당시 유명화가들이 화제(畫題)를 쓴 그림인데 김덕형이 그렸을 것이라고 추론한 전문가들의 의견이 흥미로웠다. 사실이면 놀랍고 획기적인 발견이겠지만 아쉽게도 그림을 그린 화가를 특정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현재까지 김덕형의 그림이 발견된 적이 없어 그의 화풍과 비교가 불가능했고, 그림 어디에도 그 그림을 김덕형이 그렸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 후기는 사실적이고 장식성이 강한 화풍이 태동하던 시기여서 꽃 그림을 잘 그렸던 사람이 김덕형뿐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유명화가들이 함께 그린 균와아집도라는 그림에 김덕형이 등장한 것도 결정적인 증거로는 역시 부족해 보인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백화보에 있을 것이다. 백화보가 발견되는 날을 기다리며, 당시의 그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관심과 분발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