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윤석열 대통령과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연이어 장병들의 '정신전력'을 강조한 이후 정신교육 교재 관련 취재를 하던 때였습니다. 군 당국은 이 교재가 대외비는 아니라면서도 외부에 공개된 적이 한 번도 없다면서 열람 요청을 완곡히 거부했습니다.
교재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은 이유를 요약하면 △장병 정신교육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교육 내용도 객관성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수호 등 교육 목적에 맞게 해석됐고 △이런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면 불필요한 논란을 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수호하려는 신념을 심어주려면 체제의 장점을 극대화해야 하기 때문에 경쟁 심화나 빈부격차 등 어두운 면에 대한 교육은 불필요하다는 것이죠. 일반 국민 대상으로 지식 전달을 위한 교육 내용과는 성격도, 내용도 다릅니다.
현장에서 교육하는 장교들도 교육의 목적 달성을 위해 어느 정도 주관적 해석이 가미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한 예비역 정훈장교는 "국가관, 대적관 등을 가르칠 땐 역사적 해석에 있어 어느 정도 보수적으로 치우친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면서도 "교관의 재량에 따라 너무 심하다 싶은 부분은 적절히 걸러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말 베일에 싸여 있던 이 교재가 최근 외부에 공개됐습니다. 살펴보니, 왜 군이 공개를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논란이 된 건 역사 편향 문제였지만 곧 정권 홍보 논란으로 이어졌습니다. 5년마다 발간하는 교재인 만큼 정권 변화에 따라 내용이 바뀌는데, 전임 문재인 정부 당시엔 북한을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교재에는 한미 동맹 강화와 관련해 윤석열 정권의 업적을 담은 내용이 다수 포함됐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노골적 정권 홍보, 꼰대 병영문화 강요, 역사 왜곡을 담은 교재는 정신 전력 강화는커녕 군대를 정치의 장, 갈등과 분열의 전쟁터로 변질시킬 것"이라며 해당 교재의 사용 금지 가처분 등 법적 조치도 강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은 애교에 불과했습니다. 여론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건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 부분입니다. 독도를 영토분쟁 지역으로 기술한 데다, 교재에 실린 11개의 한반도 지도 가운데 독도가 표기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친일 교재' 논란이 불거진 것입니다. 급기야 대통령실은 이례적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내용을 보고 받고 질책했다"고 밝혔습니다. 국방부는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죠. 곧바로 배포된 교재 2만여 권을 회수하고 집필 과정 전반을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책임자 처벌도 약속했죠. 원점 재검토인 셈입니다.
안 그래도 현 정부는 친일 성향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터라 정치권, 시민사회단체들은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와 발맞춰 한일 관계 개선에도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문제나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문제 등에서 너무 일본 편에 선다는 진보 진영의 비판이 거셌습니다. 심지어 북한마저 논평을 통해 "윤석열 역적패당이야 말로 이완용보다 더한, 역대 친일매국노들까지도 무색케 하는 최악의 반역무리, 특등 매국노들"이라고 거들고 나섰습니다.
이번 정신교육 교재 파문에서 드러난 가장 큰 문제는 군의 폐쇄성입니다. 군대라는 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교재는 과거에 비교하면 외부 필진 및 감수 인원이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군인이 만들고, 군인이 감수한, 군인을 위한 교재였던 것입니다. 자연히 전문가 집단의 팩트 체크도, 언론의 균형감도 없는 엉터리 교재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교재 제작에 있어서 군 자체적으로 안이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내용의 상당 부분이 과거 교재에서 '복붙'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아무리 교재의 목적이 장병들의 정신교육이라 하더라도 지나친 폐쇄성은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일각에서는 이참에 군 정신교육 방식이나 국가관·대적관·군인정신으로 균등하게 나뉜 편성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옵니다. 2023년 대학 취학률은 76.2%. 군에 입대하는 장병들 역시 대부분은 고등교육의 문턱을 넘어선 이들이란 얘깁니다. 한 사관학교에서 정신교육을 담당했던 정훈 장교는 "생도의 대부분이 한국사 능력시험 1급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에게 군대의 시각으로 역사 교육을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외려 편향된 역사 교육 때문에 군에 대한 신뢰만 떨어질 수 있습니다.
차라리 군이 강조한 것처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군사 강국 러시아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필사의 각오로 전투에 임하는 군인정신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병사 복무 기간은 18개월(육군 기준)에 불과합니다. 군에 와서 인식을 바꾸길 기대하기보다는 전역 후 이들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되는데 군대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군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생의 교훈은 강인한 정신력과 끈끈한 동료의식일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왜 지켜야 하는가'는 군이 가르치지 않아도 입대 전부터 잘 알고 있을 터입니다. 어설픈 역사관과 대적관보다 필승의 군인정신을 제대로 기를 수 있도록 집중하는 것이 군 정신전력의 핵심임을 곱씹어 봤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