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니 4월 총선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느낌이다. 작년 한 해만이라도 치열하게 논의했어야 하는 선거제 개편은 공중분해된 채로 말이다. 선거제도는 ‘게임의 룰’이다. 룰이 게임의 내용을 좌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거제도는 정치의 내용을 좌우한다. 그럼에도 정치의 내용을 어떻게 하면 향상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런 면에서 유럽 몇몇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남녀동수제’는 정치의 내용과 선거제도 간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프랑스는 그 대표적인 나라다. 프랑스의 ‘파리떼(Parité)’법은 남녀가 동등한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의회가 남녀동수로 구성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각 정당은 선출직 후보를 공천할 때 50%를 반드시 여성후보에게 배정해야 한다. 정치 분야 여성할당제가 비례대표에 국한돼 있으며, 그 비례대표의 수가 너무 적으며, 그것마저 축소하자는 주장이 버젓이 등장하는 한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역시 근대 입헌주의를 연 시민혁명과 인권 선언의 나라여서 가능한 것이었나 싶지만, 프랑스도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인간을 남성으로 국한한 남성중심적 정치 문화에 가톨릭 기반의 보수적인 일상 문화가 결합해 1997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출직 정치인에서 여성의 비율이 6% 정도였다. 이는 유럽에서 가장 낮은 수치였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기, 혁명에 동참한 많은 여성이 너무도 당연하게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했지만 1944년에서야 참정권이 주어졌으니 말 다했다.
그렇다면 ‘남녀동수제’는 어떻게 시행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 대단히 흥미로운 젠더 논리가 힘을 발휘했다. 처음에는 프랑스도 ‘여성할당제’를 시행하려고 했다. 1960, 70년대 프랑스 사회를 풍미했던 여성운동은 프랑스의 낮은 여성 대표성을 높이기 위한 여성할당제를 제안했고 이런 내용을 포함한 선거개혁법이 1982년 국회를 통과하면서 현실화되는 듯 보였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이를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논의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헌법재판소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 당시 발표된 인권선언이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한 주권자임을 이미 선언하고 있는데 여성할당제는 시민들 간에 성별 구분을 도입해 주권의 통합을 위협하기 때문에 이는 허용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여기에는 프랑스가 근대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이 깔려 있었다. 프랑스의 헌법재판소는 할당제를 지극히 ‘미국적’인 제도로 봤다. 할당제는 예컨대 흑인이나 여성과 같은 집단 정체성을 이유로 배제된 권리를 다시 그 정체성의 이름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논리에 기반한다. 이런 제도가 가능한 이유를 도저히 통합할 수 없는 다양한 정체성의 집단들로 구성된 이민 국가 미국의 특징에서 찾은 것이다. 즉 흑인이 흑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여성이 여성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보는 할당제는 다소 질이 낮은 정치 논리이기에 민주적 공화주의의 원조 프랑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은 참으로 ‘신박’하면서도 근본적인 것이었다. 선출직 정치인들이 자신이 속한 성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수긍하되 그들이 대변하는 시민들이 여성 아니면 남성이라는 데 주목한 것이다. 인간이 여성과 남성으로 나뉜다면 선출직 정치인들도 그렇게 구성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여성 정치인은 여성들을 대표하지도, 동일하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남성 정치인이 남성들을 대표하지도, 동일하게 행동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주권자인 시민의 의지를 통합적으로 대변하며 (왜냐하면 남성처럼 인간의 한 유형이니까!) 다양한 의견과 판단을 가진다고 프랑스의 페미니스트들은 주장했다. 이런 사회적 논의는 1999년 개헌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프랑스는 2000년부터 거의 모든 선거에서 남녀동수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선거에서 여성 의원 비율이 50%에 육박하게 됐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몸이거나 성(性)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어 번역어 ‘여성혐오’의 원어 ‘미소지니(misogyny)’의 논리다. 번역어는 이를 여성에 대한 개인적 미움이나 공격 정도로 여기게 하는데 ‘미소지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위치에 따른 다양한 의견과 판단을 하는 존재, 즉 한 명의 인간이자 시민이 아니라 그저 ‘여자’로 환원되는 제도, 담론, 일상문화의 총체가 바로 미소지니다. 따라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자신의 계급, 학연과 지연, 장애 여부 등에 따라 다양한 위치를 가지며 다양한 의견과 판단에 따라 시민들을 대변한다고 본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은 미소지니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한국적 미소지니는 여전히 힘이 세다. 국회의원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도 여성이면 문제가 생겼을 때 ‘여자’로 격하된다. 2016년 촛불 정국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랍시고 등장했던 나체화에 대해 여성들이 그토록 항의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근혜의 잘못은 ‘그저 여자’의 잘못이 아니라 대통령의 잘못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그녀를 ‘여자’로 만들지 않고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이것이 여성들의 주장이었다.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조사도 마찬가지다. 작년 말 ‘김건희 특검법’이 통과됐다. 통과 직후 대통령실은 ‘총선을 겨냥해 흠집 내기를 위한 의도로 만든 법안’이란 생각이 확고하다고 밝혔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특검 브리핑이 총선 시기 ‘동료 시민’들의 중요 선택을 저해하는 독소 조항이라며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미 작년 2월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범들의 1심 판결에서 ‘김건희 계좌’가 범행에 사용된 사실은 적시된 바 있다. 이는 국민의 ‘알권리’와 그에 입각한 제대로 된 중요한 선택을 위해 빨리, 제대로 밝혀야 할 사안 아닌가?
대통령 배우자는 대통령의 의무와 권한 내에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기에 요구되는 당연한 윤리적 기준이 있다. ‘그저 여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논문 표절과 허위 경력 기재 논란에서부터 지인의 나토 순방 전용기 탑승 등 비선 논란, 수천만 원대 보석 재산신고 누락 공방, 국가기록사진 촬영 문제, 명품백 수수 사건 등 끝없는 행적이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여기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뿐 아니라 김건희 여사가 ‘그저 여자’라는 감각이 작동한다. 이런 미소지니 사회에서 어떤 여성들은 여성성을 자원화해 남성 네트워크에 진입하고 비공식적 권력을 누린다. 여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면서 동시에 모든 일의 배후에는 여자가 있다는 식의 발상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김 여사를 둘러싼 ‘줄리 논란’과 ‘암컷 논란’은 미소지니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여사의 경제적 자원, 대통령 후보자 배우자 및 대통령 배우자라는 지위, 그 위치에서 작동하는 젠더 논리를 무화시키고 ‘그저 여자’로 환원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돼버리면 여사의 진짜 잘못을 가릴 수 없게 된다. 대통령 배우자의 잘못은 대통령 배우자의 잘못으로 조사하고 비판하면 된다. 남성들에게 하듯이 말이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이 하나의 동질적 집단이며 무조건 옹호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고 보는 주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여성은 하나의 집단이 아니며 자신의 위치에 따라 온갖 다른 정치를 펼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남성 정치인 숫자만큼의 여성 정치인을 선출할 수 있는 남녀동수제와 대통령 배우자를 ‘그저 여자’가 아닌 공인으로 조사하는 ‘김건희 특검법’이 함께 필요하다. 그게 이 시대 페미니스트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