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옆자리 중년의 차장님이 대뜸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이 스칠까요. 이직도, 휴직도 아닌 전직? 18년 차에? 그게 가능한가?! 그러다 이렇게 결론 내릴 겁니다. ‘그냥 하는 소리겠지.’ 일도 삶도 팍팍하니 괜히 입 밖으로 내어보는 푸념이라고 말입니다.
18년 차 차장의 전직 선언, 이 사람의 실화입니다. 그때까지 그에게 직장은 딱 하나였어요. 그런데 그 선언 이후 달라졌죠. 실행에 성공했고, 그 이후 네 개의 직업을 거쳤습니다. 기자에서 아동 인권 활동가로, 대통령의 선택을 받은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고위공직자로.
이력만 보면 배포가 대단할 것 같은데, 마주 앉은 자리에서 조마조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합니다. 이렇게 털어놓기도 했죠. “어떡하죠.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근사한 답변은 못할 거 같아요. 이룬 것도 없지만, 전략적으로 이룬 건 더더욱 없거든요.”
의아했습니다. 남들은 한 번도 어려운 ‘전직’의 역사에 그 어떤 계획도 없었다니. 그는 말했습니다. “내겐 오직 우연 속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고요. 그건 패기 있는 낙관이었습니다.
바로 김희경(57) 작가입니다. 올해 비혼 여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책 ‘에이징 솔로’의 저자죠. 동아일보 기자에서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부장으로, 여성가족부 차관을 거쳐 무소속 작가의 삶까지. 자신만의 궤도를 개척한 퍼스트 펭귄, ‘맨땅브레이커’의 여덟 번째 주인공입니다.
입사와 동시에 한 발 뺄 생각부터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았습니다. 기자란 일은 ‘올인’ 없이 할 수 없는 일이란 걸요. 그렇다고 그 일이 싫진 않았습니다. 아니, 점점 마음에 들었습니다. “‘질문’을 무기로 삼아,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업의 본질 역시 체감했거든요. 그 시절 그에게 기자라는 업은 ‘시대적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과연 내 일이구나’라고 여긴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우선 업의 특성이 희경씨의 ‘산만한 기질’과 제법 잘 맞았습니다. 한 우물을 진득하게 파는 건 못해도, 한번 꽂힌 걸 빠르게 쫓는 데엔 소질이 있었거든요. 다른 하나는, 희경씨가 가진 글쓰기 습관과 언론사에서 요구하는 문장 스타일이 맞아떨어진다는 점이었어요. 미문(美文)엔 자신이 없어도, 쉽게 읽히는 간명한 문장을 써내는 데엔 자신이 있었죠.
자신에게 이런 강점과 기질이 있다는 걸 이 일을 해보기 전엔 몰랐습니다. 밥벌이를 핑계로 세상에 ‘나’를 내보이면서 조금씩 알게 됐죠.
그런데 그 일이 점점 불편해졌습니다. 기자 시절을 돌이키며, 희경씨는 자신을 ‘명예 남성’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 시절 신문사엔 ‘여자 몫’이 거의 없었어요. 여자 여럿에게 딱 한 자리만 주고 서로 싸우게 만들었죠. 어느 순간 나를 돌아보니 살아남겠답시고 남자 흉내를 내고 있더라고요.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를 안 마시고 버티는 여자 후배가 있으면 무섭게 몰아붙여 끝내 눈물을 터뜨리게 했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자괴감이 들었어요. 그렇게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됐죠. 적성에 맞는 일이었지만 기자를 하는 내내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힘들었던 이유는 그런 문화나 관행 때문이었어요.”
‘짐짓 거칠게 굴며 센 척을 하는 나’와 그 이면에 ‘겁 많고 소심한 나’가 공존했죠. 그렇게 분열된 자아로 살았으니 고통스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심지어 나중엔 ‘꾸며낸 자아가 진짜 자아가 되면 어쩌나 싶어 두려워하는 나’까지 끼어들어 자아가 세 갈래로 나뉘었죠. 그 괴리가 점점 벌어져 더는 견딜 수 없었을 때 희경씨는 스스로에게 물었대요.
‘나를 버리고 이 질서에 따를 것인가, 내가 이 조직에서 떨어져 나갈 것인가.’
그 고민의 기로에 섰을 때, 결정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친구처럼 각별했던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것이죠. 2007년, 동생 나이 불과 서른여덟이었습니다. 믿기지 않는 허망한 이별이었죠.
“몸이 아파서 처음으로 일을 쉬고 있을 때였어요. 정말 사랑했던 남동생이 그렇게 가고 나서, 내 삶을 이대로 두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구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실제로 그 삶의 유한성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일은 드물죠. 전 그걸 사고처럼 목격하게 된 거예요.”
그는 결심했어요. ‘이젠 벗어날 때가 됐다’고.
“끈질기게 ‘하우투’를 물었지만 끝내 방법을 알아내지는 못했어요. 대신 다른 걸 얻었죠. ‘일단 움직이면 된다’는 용기. ‘태도’를 배운 거죠. 여러 경우의 수를 계산할수록, 두 다리가 무거워졌거든요. 내가 만든 계획에 내가 압도되는 거죠. 길을 바꾸고 싶은 순간이야 많았지만 ‘나가서 뭐 해 먹고 살아’라는 걱정이 더 컸어요. 겁주는 말들도 신경 쓰였죠. ‘회사 나가면 허허벌판이야, 정글에서 살아남을 자신 있어?’ 뭐 그런 말들. 그래서 마음을 바꿔 먹었죠.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일단 움직인 다음 생각하자.”
기회는 어느 날 감나무 아래로 감 떨어지듯, 뜬금없이 찾아왔습니다. ‘터닝포인트’ 인터뷰로 만난 최혜정씨를 찾아간 날이었습니다. 한때 잘나가는 광고인이었다가, 아동인권단체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커리어 2막을 연 인터뷰이였죠. 그에게서 뜻밖의 얘기를 들었어요. “우리 단체에서 홍보 일을 담당할 리더를 찾고 있어요. 주변에 괜찮은 사람 없어요? 난 ‘리틀 김희경’이면 좋겠는데.”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는 순간이었죠. 희경씨는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아니 왜 ‘리틀’까지 가요? 그냥 제가 할게요.”
면접까지 일사천리였어요.
“이사장이 한동안 저를 관찰하더니 홍보가 아닌 다른 일을 제안했죠. 국내 아동인권단체 최초로 도입되는 ‘권리옹호’라는 일이었어요. 아동권과 관련한 사회적 이슈를 캐치하고 이걸 정치적으로 쟁점화하는 업무였죠. 왜 나에게 그런 중한 일을 맡기려 하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어요. ‘당신한테는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는 홍보보다는 각이 날카롭게 서 있는 일에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저보다 저란 사람을 정확히 본 분이었죠.”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업무 메뉴얼을 받아 들었는데 의외로 ‘할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현실의 사건 속에서 일관된 패턴을 찾고, 그걸 이슈화하는 일. 사회부 기자 시절에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거든요. 차이점이 있다면 기록하는 ‘관찰자’에서 행동하는 ‘참여자’가 된다는 거였죠.
“처음 일자리를 권유했던 혜정 선배가 인터뷰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일이 좋은 이유가 뭔 줄 알아요? 내 노동이 만들어내는 가치가 눈에 보인다는 거예요.’”
그 말에 혹했죠. 기자로 일하며 큰 무력감을 느꼈었거든요. ‘문장에 대체 무슨 힘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활동가가 되어 처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보니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난 관찰자이자 참여자일 때 가장 나다울 수 있다는 걸요.”
‘행동하는 희경씨’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일가족 동반 자살’ 사건 보도가 쏟아져 나왔을 땐 아침마다 전화기를 붙들고 일간지 사회부에 전화를 돌렸어요.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사건에 ‘동반 자살’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 달라는 항의였죠. 쓰는 일도 계속했습니다. 수많은 논평과 성명서가 그의 손에서 세상에 퍼져나갔습니다. 기자가 쓰는 기사와는 다른 생명력을 느꼈죠.
현장에서 발로 뛰며 그는 새삼스레 알게 됐어요. 자신 안에 단단히 영근 전문성이 무엇인지. ‘기자 생활 18년이 혹시 ‘물 경력’은 아니었나’ 의심했던 시간과도 말끔히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에겐 전문성이랄 게 하나도 없는 줄 알았어요. 다른 일을 해 보니 내 무기를 알겠더라고요.
첫째, 어디에 데려다 놓든 어떤 낯선 일을 주든 빠르게 파악할 줄 아는 기민함을 갖췄다는 것. 둘째, 난삽한 정보들을 이야기의 구조로 재구성해 메시지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내가 내 전문성을 얕봤던 거예요. 남들은 못하는 것,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그게 전문성이 아니고 뭐겠어요?”
희경씨는 “아동인권 활동가로 일하는 6년 동안 내내 ‘같은 문제를 다른 문제로 착각하는 사람들’과 마주쳐 왔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죠. 학대엔 손가락질하면서, 체벌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런 세상의 무지를 허물려고 쓴 책이 ‘이상한 정상가족’이에요.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로 보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지적하고, 가족 내에서 아동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현실을 조명했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책을 읽은 소감을 작가에게 편지로 보낸 사실이 알려져 베스트셀러가 된 그 책입니다. 출간 3개월 만의 일이었죠.
이 책은 희경씨에게 ‘여성가족부 차관으로서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언론인으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보로 일하기 시작했던 무렵, 책에서 지적한 사안을 다루는 여성가족부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겁니다. 그의 마음을 녹인 건 당시 진선미 여가부 장관의 한마디였습니다. “책에 쓴 문제들을 직접 해결해 보고 싶지 않아요?” 커리어 1막과 2막을 거치며 쌓아 올린 커리어의 밑천이 3막을 자연스럽게 열어준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제 앞날을 예측해 본 적이 없어요. 커리어 패스를 전략적으로 계획해 본 적도 없고요. ‘지금의 경험이 나중에 어떤 소용이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여겼죠. 그래도 현재의 삶에 충실하다 보면 별개로 보이는 경험과 배움이 서로 연결된다고 믿었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자기다움을 형성하게 될 거라고요.”
그땐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의 안에서 독자적인 자기다움을 형성한 경험은 무엇이었을까요.
희경씨는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하는 6년 동안, 아동 관련 사회 이슈를 ‘쟁점화’하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정확한 쟁점을 만들기 위해선 사건의 디테일을 샅샅이 뒤져야 했죠. 특정 사안과 관련한 정보를 깊게 파고들면서, 비로소 사건의 그림이 다시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알게 됐습니다. 비극은 거대한 구멍이 아닌 ‘아주 작은 구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요.
“2012년 울산에서 부모의 학대로 숨진 이서현(당시 8세)양 사건 당시, ‘진상조사와 제도개선위원회’에 사무국장으로 참여했어요. 조사를 시작하기 전, 나름의 가설을 세워봤죠. ‘예산을 형편없이 안 줬을 거야’ ‘엄청나게 무능한 공무원이 윤리 의식 없이 우를 범했을 거야’ 같은.
그런데 시스템은 제 생각보다 엉성하지 않더라고요. 그 안의 사소한 결함이 문제였죠. (학대 아동을 모니터링하는)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사가 격무에 치여 딱 한 번 아이의 집에 방문하지 못했다거나, 학대당하던 아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사한 지역에서 새 상담사가 연결되지 않았다거나. 정말 작은 구멍이 모여 거대한 구멍이 되는 거예요. 눈에 잘 안 보이는 구멍이니까 더 막기 어려웠던 거죠.”
당시의 현장 경험은 공직에 진출했을 때 그 값어치를 발휘합니다. 사안을 다루는 ‘분별력’을 만들어 준 거죠. 관련 부처의 책임자가 됐을 때, 그는 문제의 원인을 단일한 곳에서 찾거나 책임자 몇몇을 벌주는 조치에 힘을 빼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대수롭지 않게 ‘놓쳤을지도 모르는’ 사소한 오류를 잡아내는 데에 공력을 집중했죠.
“활동가일 땐, 내가 목소리를 내는 쪽이었죠. 공직자가 되고 보니 경합하는 수백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어요. 듣기만 해서도 안 되죠. 그걸 조율하고 취합해 어떻게든 제도로 연결해야 했어요. 그 자리에 가보고 나서야 알게 됐죠. 이게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래서 한 발자국도 함부로 뗄 수 없는 자리라는 걸.”
희경씨가 차관 자리에서 가장 열심히 추진한 업무는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이었습니다. 비혼 동거 연인이나 혈연관계로 묶이지 않은 관계도 법률상 ‘가족’에 포함될 수 있도록 제도를 손보는 일이었죠. 하지만 임기 내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2020년 물러났습니다. 서로 맞부딪치는 목소리를 끝내 봉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받은 쓰린 성적표였죠. 그 이후 여가부는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안 자체를 아예 폐기했습니다.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은 한 20대 여성이 저에게 먼저 연락을 해 온 적이 있어요. 자기가 아동 학대 피해자인데 정말 큰 위로를 받았다고. 이런 책을 쓴 작가님이 정부로 가셨는데 왜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느냐고 묻더라고요. 부끄럽고 참담했습니다.
공직에 있으면서 좌절하긴 했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원하는 세상이 모습이 100이라면, 가능성은 10, 현실화될 수 있는 범위는 1이구나. 값진 깨달음을 얻었죠. 반 발짝의 변화조차 끈질긴 씨름을 통해서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뭔가를 바꿀 생각이 있다면 길고 꾸준하고 질겨야 한다는 것을요.”
공직 생활을 하며 희경씨가 배운 태도가 있습니다. 몇 보의 후퇴를 ‘패배’라고 섣불리 결론 내지 않는 자세죠. 변화란 것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온다는 것을 체감한 덕분입니다.
“2020년 성매매 피해 아동ㆍ청소년을 처벌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아동청소년 성 보호법을 개정했어요. 2019년에 터진 ‘N번방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됐죠. 제 임기 중에 처리한 일들 중 가장 뿌듯하고 잘한 일이에요. 지금 보면 상식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현장의 관련 단체들은 무려 10년을 싸워왔어요. 내내 설득에 실패하고 번번이 미끄러지다가 ‘N번방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게 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 거예요. 그 모든 과정에 함께하면서 비로소 믿게 됐죠. 더디게라도 세상은 바뀐다는 걸요.”
“그럼 이제 백수네? 백수로도 살 만해? 불안하지 않아?” 직장 없이 글쓰기와 강연을 하며 살아가는 그를 보며 ‘정규직’ 친구들은 묻습니다. 그의 답은 이래요.
“자발적 은퇴를 세 번이나 해 봤지만, 그 경험이 매번 쉬운 건 아니었어요. ‘아침에 눈떠서 향해야 할 곳이 없네? 매달 꽂히던 월급이 없네? 혼자 사는 나는 ‘내가 나의 가장’인데 어쩌지? 대낮에 단지를 돌아다니면 경비원 아저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죠. 그렇게 막연히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해요. 자연스러운 수순이죠.
이젠 그게 막 두렵지는 않아요. 한 직장을 오래 다닌 친구들은 한창 은퇴를 무서워하는데, 요즘의 저는 오히려 은퇴의 두려움에 매몰되지 않아요. 소속 없이 일하고 있는 지금이 불안하지도 않고요. 앞으로 내가 어디서 뭘 또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내 인생을 적극적으로 바꿔본 경험이 있으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믿어요. 그렇게 믿다 보면 풀리리란 걸 아니까. (웃음)”
그가 처음으로 전직을 시도했던 때는 직장 생활 18년 차였습니다. ‘조직 밖’이 무서워질 무렵이었죠. 회사 바깥에선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만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상태이기도 했죠. 그래서 자신을 과감히 밀어 넣었습니다. 한번 하고 나니 생각보다 별 게 아니었답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더 쉬웠죠.
희경씨는 현재 ‘전업 논픽션 작가’로 일하고 있어요. 그의 네 번째 직업입니다. 지난해엔 다섯 번째 책인 ‘에이징 솔로’를 펴냈습니다. 40, 50대 비혼 여성 19명을 만나 ‘혼자 사는 삶’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자 그의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고뇌를 반영한 책이죠.
인터뷰 말미에 이르러, 희경씨에게 이런 문구를 들려줬습니다. 2009년 낸 인터뷰집 ‘내 인생이다’의 프롤로그에서 던진 질문입니다.
“내가 나인 채로 우리는 스스로를 긍정하며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그로부터 15년 후, 쉰일곱 살의 그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물론이죠. 예전엔 한 우물을 끈질기게 판 사람을 동경했어요. 오로지 한 분야만을 강단 있게 파서 대가이자 달인이 된 사람을요. 어느 순간부터는 애써 다른 사람이 되기를 열망하지 않게 됐죠. 길을 세 번이나 바꾸긴 했지만, 매번 과거의 나를 싹 지우고 완전히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간 내가 해 온 선택, 그간 내가 만난 사람들, 그간 내가 해 온 일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든 거죠.”
이제는 인정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쪽이 아니라 ‘일단 행동하는 쪽’인 사람이라 더 재미난 일이 많았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깬 맨땅’은 무엇이냐고.
“관찰하는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 각각의 길을 가기도 벅찬데 감사하게도 제 커리어엔 이 두 길이 함께 있어요. 두 길을 모두 오가며 나답게 일한 것, 그게 저만의 ‘작은 맨땅’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니 희경씨가 한 강연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7년 전, 일하는 여성들이 모인 커뮤니티 강연에서 한 말이었죠. 그는 자신의 인생을 두고 ‘축구장에서 발야구를 하게 된 인생’이라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덧붙였습니다.
“그게 실패한 결과일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내 재능과 관심이 빛을 발하는 영역을 찾아내는 거니까.”
그러니 지금, 축구장에서 발야구를, 피구를, 족구를 하고 있는 당신. 자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길을 먼저 가본 이가 말하네요. ‘당신만의 경기장’이 저기 있다고. 그곳에서 당신만의 룰과 속도로 당신만의 경기를 펼쳐 보라고요.
희경씨에게 '커리어 인생 곡선'을 그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커리어에 따른 마음을 그래프로 표현해 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그가 그린 그래프엔 세 번의 커다란 파도가 있었습니다. 하나의 직업에 마침표를 찍고 다른 직업으로 넘어가기 전, 아주 깊은 골짜기가 있었죠. 그는 이 시간을 '자발적 은퇴의 시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바닥의 시간을 그는 어떻게 보냈을까요. 그리고 어떤 번민이 있었을까요. 희경씨의 '파란만장 커리어 그래프'와 함께 고민의 흔적이 담긴 '세 권의 업무 수첩'을 확인해 보세요. 특별한 볼거리가 담긴 페이지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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