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도쿄여? 런던이여?" 젊은 소비자들은 왜 외국어 간판에 매혹되나

입력
2024.01.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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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풍경이 된 글자들, 외국어 간판]
①청년 중심 상권, 외국어 간판 대유행
②해외 도시엔 한글 간판..."한류 인기"
③'읽기 불편"...노년층 소외·배제 지적도

요즘 한국 도시의 풍경을 완성하는 건 외국어다. 한글을 함께 적지 않고 외국어만 쓴 간판을 내건 카페와 식당이 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봉쇄 기간을 거치며 이국적 감성에 목말랐던 젊은 소비층을 겨냥한 것이다. 영어만 쓰는 게 아니다. 대다수 한국인이 읽지 못하는 일본어, 중국어, 베트남어로 외관을 꾸민 공간도 많다. 해외에선 반대다. 주요 도시 상권에선 현지어를 빼고 한글 간판만 단 상점이 인기다.

낯선 글자로 뒤덮인 간판으로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소비자를 끌어라'… 런던·도쿄가 된 카페와 식당

"'찐 베트남 맛집'으로 느껴졌어요." 서울 용산구의 베트남 음식점 효뜨에서 만난 대학생 윤지원(23)씨의 말이다. 이 식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베트남 현지 분위기를 잘 살린 곳으로 이름났다. 간판엔 '효자'를 의미하는 베트남어 '효뜨'와 베트남 전통 음식인 쌀국수를 뜻하는 '포'가 한글 병기 없이 적혀 있다. 윤씨는 "쌀국수 맛집을 찾다가 간판이나 인테리어가 현지 식당처럼 느껴져 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요즘 SNS 맛집 후기의 공통된 특징은 "OO에 온 듯 이국적"이라는 묘사다.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SNS에 공유하는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의 취향과 딱 맞아떨어져서다.

2021년 9월에 개업한 베이글 가게 '런던 베이글 뮤지엄'은 외국어 간판 열풍의 원조 격이다. 간판만 영어인 게 아니다. 가게 외관이 온통 영어이고, 소비자들은 여기에 열광한다. 얼마 전 오전 8시 30분쯤 도착한 런던 베이글 뮤지엄의 서울 안국점. 더 이상 '신상 맛집'이 아닌데도 여전히 약 80명이 가게 입장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었다. 20번대 대기표를 받고 매장에 들어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이날 매장에서 식사할 수 있는 대기표는 오전에 마감됐다. '런던 감성'을 앞세운 이 가게는 2년 만에 영업점을 서울, 제주 등에 4개로 늘렸다.

젊은 소비자들이 몰리는 이른바 '핫플레이스'의 자영업자들에게 외국어는 가성비 좋은 마케팅 수단이다. 외국어 광고 전단을 가게 벽에 붙여 두기도 한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OOO길'이라고 불리는 상권은 소비자를 모으는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며 "소비자의 선택을 돕는 가장 직관적인 정보는 간판이고 낯선 외국어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웃한 상점으로 외국어 쓰기가 퍼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덧붙였다.


한류 덕에 호감도 높아진 한글 간판

일본 도쿄에 사는 회사원 누노메 유카리(42)는 주말마다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에 간다. 한글 간판을 내건 음식점과 술집, 슈퍼마켓 등이 늘어선 지역이다. 지난해 서울을 두 번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을 좋아하는 누노메는 "비행깃값이 올라 자주 한국에 못 가서 섭섭한데 신오쿠보에 가면 한국에 다녀온 기분이 들어서 좋다"고 말했다.

외국어 간판의 유행은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특히 아시아에선 한글 간판의 호감도가 상승 중이다. 이국적인 데다 K팝, K드라마를 환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 한때 우범 지역으로 불렸던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은 K팝 열기 덕에 6, 7년 전쯤부터 학생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됐다.

동남아에서는 한국 식당이 아닌데도 한글 간판을 쓴다. 말레이시아에 거주 중인 김수진(가명·44)씨는 "한글 간판이 반가워 들어갔다가 말레이시아인 운영자가 현지화된 한식을 팔고 있어 당황한 경우가 적지 않다"며 "한국인 입맛에는 맞지 않지만 한류를 좋아하는 현지인 사이에서는 인기가 많은 음식점들"이라고 전했다.


'노실버존' 상징 된 외국어 간판… 배제의 글자

언어는 그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배제와 차별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현재의 노년층은 영어를 누구나 어릴 때부터 배우고 자란 세대가 아니다. 이들에게 외국어 간판은 "오지 말라"는 표식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서울에서 영어 간판을 달고 빵집을 운영하는 A씨는 한글을 병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노년층 손님을 배제할 의도가 있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까다로운 노년 고객을 접한 기억이 별로 좋지 않아서 젊은 손님들에게 좀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각 지방자치단체에는 외국어 간판 단속을 요구하는 민원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지자체가 한글 간판을 강제할 명분은 없다. 옥외광고물법 시행령은 간판에 외국 문자를 표기할 때 한글을 병기하도록 규정하지만, 건물 높이가 4층이 넘지 않고 간판 면적이 5㎡ 이하면 허가·신고 대상이 아니다. 서울시 관계자는 "'손님을 끌기 위한 고유의 디자인이니 간섭하지 말라'며 단속에 반대하는 민원을 넣는 영세 사업자들도 있다"며 "외국어 간판을 둘러싼 민원이 잦아져 정확한 실태 조사를 할지에 대해 각 자치구와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거리의 공공재적 성격을 감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간판의 가독성을 위해) 지자체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애 교수는 "외국어 간판이 격차와 배제를 발생시키는 면이 있다면 정부가 제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외국의 한글 간판은 자랑거리라면서 왜 한국에 있는 외국어 간판은 문제 삼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40대 회사원 B씨는 "젊은 소비자들에게 '사대주의 프레임'을 씌우기보다는 이국적 감성의 상권을 특화하고 다른 지역은 지자체가 좀 더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식의 타협점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문이림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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