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이 약속이나 한 듯 신년사에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다짐했다. 재판 지연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헌법상 '국민이 재판받을 권리'마저 침해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두 헌법기관장이 모두 '속도'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 것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31일 낸 2024년 신년사에서 "신속하지 못한 재판으로 고통받는 국민은 없는지, 공정하지 못한 재판으로 억울함을 당한 국민은 없는지, 법원의 문턱이 높아 좌절하는 국민은 없는지 세심히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이어 "정보통신 강국의 이점을 살려 재판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법원의 각종 절차를 개선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11일 취임한 조 대법원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재판 지연 해결'을 강조했다.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민사 사건 처리기간은 1심 420일, 항소심(고법)은 332일, 상고심(대법원)은 461일로, 심각한 수준이다. 조 대법원장은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한국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됐지만, 사회 내부에서는 크고 작은 대립이 심해지고 불공정과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며 "법원도 빠르게 변하는 사회 흐름과 더욱 높아진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짚었다.
이종석 헌재소장 역시 이날 발표한 신년사에서 "국민의 신뢰와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이 가장 우선돼야 한다는 것을 헌법재판소 구성원들은 모두 알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라틴어 격언 중에 천천히 서두르라(Festina lente)는 말이 있는데, 우리말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가르침과도 통한다"며 "천천히 서둘러서 국민이 헌법을 통해 부여한 소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헌재 역시 재판 지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2017년) 이후 매해 3,000건 안팎의 사건이 접수되고 있지만, 사건 처리 속도가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받는다. 2년 넘게 처리되지 못한 사건이 486건(8월 기준)에 달하는 등 장기 미제 문제도 심각하다. 이 소장은 "헌재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며 "지난 시간 쌓아 올린 경험과 성과를 바탕으로 미래를 향한 도약을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