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또는 초저가만 살아남는다. 올해 유통가를 관통하는 소비 경향이다. 해외여행, 명품, 오마카세 등 한 번에 크게 쓰는 럭셔리족,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지고 쌀 때 여러 개 쟁여 두는 구두쇠는 모순적이나 공존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종료 이후 미뤄 둔 지출을 쏟아내는 '보복 소비'와 고물가에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짠물 소비'가 섞이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롯데홈쇼핑은 27일 올해 TV 홈쇼핑 판매 과정에서 고가 프리미엄 상품과 저렴한 가성비 상품에 수요가 몰리는 '중간 실종'이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1월부터 이달 24일까지 구매 정보를 분석한 결과다.
중간 실종은 비싸지도 싸지도 않은 어중간한 가격대의 상품은 시장에서 도태하는 소비 양극화 현상을 뜻한다. 매년 소비 경향을 제시하고 있는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등이 올해의 주요 키워드로 꼽은 '평균 실종'과 비슷한 개념이다.
롯데홈쇼핑에 따르면 '탕진잼', '플렉스'란 신조어로 대변되는 결제액 50만 원 이상 고가 상품 주문 건수는 전년 대비 30% 늘었다. 특히 해외여행 상담 예약 건수가 130% 뛰면서 고가 소비를 이끌었다. 해외여행은 코로나19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으로 올해 들어 폭발적으로 증가한 소비 분야다. 물론 해외여행이 상대적으로 싼 일본에 집중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일본 여행 역시 항공·숙박 등 경비가 만만치 않게 든다.
고급 옷감인 캐시미어를 활용해 만든 의류 제품 판매량은 전년과 비교해 50% 증가했다. 평균 판매가가 60만 원으로 다른 캐시미어 상품보다 두 배 정도 비싼 몽골 브랜드 '고요' 제품은 TV 홈쇼핑 방영 직후 10분 만에 1,000벌 팔리기도 했다.
통 큰 지출과 반대로 알뜰 소비도 눈에 띈다. 대표 생활필수품인 욕실용품 주문은 같은 기간 80% 증가했으나 평균 판매가는 오히려 10% 감소했다. 올해 100만 세트 판매를 기록한 프랑스 의류 브랜드 '조르쥬레쉬' 제품 중 가장 인기를 끈 건 '린넨 카디건 2종' 등 평균 판매가 8만 원 이하인 저가 상품이었다. 욕실용품, 의류를 고를 때 가성비를 따진 소비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중간 실종은 다른 곳에서도 포착된다. G마켓이 연중 최대 할인 행사 '빅스마일데이' 시행 첫 주인 지난달 6~12일 거래액을 전년과 비교한 결과 고액 상품군 거래가 68% 뛰었다. △가전제품 73% △시계 등 명품 잡화 48% △여행·항공권 98% 등이 대표적이다. 또 e쿠폰·생필품 등 중저가 상품군 거래액 역시 15% 증가했다. G마켓은 특가로 나온 상품을 미리 쟁여 두는 자린고비형 소비가 늘었다고 분석했다. 대형마트 등에서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자사브랜드(PB) 상품 판매가 증가하는 점도 가성비 소비로 볼 수 있다.
박재홍 롯데홈쇼핑 상품본부장은 "쓸 수 있는 비용이 한정된 가운데 고가 상품에 투자한 만큼 일상에선 가성비를 따지는 소비 성향이 강했다"며 "중간이 없는 소비 양극화 현상은 내년에도 지속될 전망이라 해외 프리미엄 브랜드부터 합리적 가격대의 상품까지 고객 필요에 부합하는 상품을 꾸준히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