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일 경기 군포시 비영리사단법인 '아시아의 창' 사무실에서 만난 베트남 국적의 티하이(44·가명)씨는 둘째 아들 성민(13) 군의 한국 사랑을 자랑했다.
국적은 베트남이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에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성민 군. 한창 언어를 배울 나이인 6, 7년 전 모국어인 베트남어 대신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떼를 썼다. 빠듯한 형편에 아들 소원을 못 들은 척해야 하는 엄마는 속이 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트남 친구의 소개로 아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곳을 알게 됐다. 아시아의창과 비영리공익재단 아름다운재단이 군포시에서 운영하는 이주민 자녀 전용 어린이집이었다. 성민 군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성장하며 원하는 한국어도 실컷 배웠다. 티하이씨는 "성민이를 어린이집에 맡긴 후부터 안심하고 일을 다녔다"며 "무엇보다 늘 혼자 시간을 보냈던 성민이 곁에 친구들이 생긴 게 가장 기뻤다"고 말했다.
성민 군과 같은 이주민 자녀의 한국 생활 보금자리가 됐던 이 어린이집은 지난해 8월 31일에 문을 닫았다. 개원한 지 꼭 10년 만이다. 군포시가 4년 전부터 이주아동에게도 보육료 지원 정책을 시행한 덕에 10명 넘던 원생들이 하나둘씩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집으로 옮기면서 미등록 외국인(불법체류자) 자녀 4명만 남았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은 폐원식에 원생 부모들을 초청해 폐원 이유를 설명하고 아이들을 집 근처 어린이집에 다닐 수 있게 연결해줬다.
헤어짐은 서운했지만 아이들이 한국에서 공적 지원을 받으며 사회에 보다 잘 녹아들 기회를 갖게 됐으니 마냥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어린이집이 지난해 8월 마지막날을 '행복한 폐원식'으로 불렀던 이유다. 이영아 아시아의창 소장은 "개인적으로는 아쉬움과 미련이 남지만 아이들을 위해선 문을 닫는 게 맞았다"며 "지방자치단체가 원생마다 보육료를 지원하면서 어린이집 소임은 다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소장이 '행복한 폐원'을 강조하는 건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군포시를 포함해 여러 지자체로부터 이주아동 보육료 지원책을 이끌어내면서 어린이집을 설립하면서 세운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여기는 것이다.
출발은 아시아의창이 2013년 군포시에 만든 미인가 가정 어린이집이었다. 처음부터 어린이집을 만들려 한 건 아니었다. 단체는 이주민의 한국 생활을 돕고자 상담을 시작했는데, 자녀 병원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갈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없다 보니, 감기 정도는 걸려도 내버려뒀다가 폐렴 등으로 병을 키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불법체류자 가정이라면 2만~3만 원(감기)으로 해결될 아이 병원비가 200만 원(폐렴)으로 치솟기도 했다.
아이를 방치하게 돼서 걱정이라는 내담자도 많았다. 특히 불법체류자는 일하러 가면서 자녀를 맡길 데가 없어 집에 남겨놓는 경우가 흔했다. 어린 아이 혼자서 컵라면이나 초코우유 등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영양 결핍을 피하기도 쉽지 않았다.
상담 결과가 쌓이면서 아시아의창 사람들은 이주민 자녀란 이유로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야 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이주민이 한국에 안착할 수 있게 도우려면 자녀들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도록 '보육권'을 보장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단체가 가정 어린이집 형태로 보육 사업에 나서게 된 이유다.
2017년 아름다운재단이 합류하면서 어린이집은 번듯한 형태로 자리잡았다. 아름다운재단이 이주아동 보육권리 지원 사업을 구체화하고 군포 시내 건물을 매입하면서 '아시아의창 어린이집'이 정식으로 문을 열게 됐다.
이주아동 전용 어린이집이 생겼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두 운영 단체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나선 결과 경기도의회는 2020년 11월 이주아동 보육 지원의 근거를 담아 보육 조례를 개정했다. 이듬해 어린이집 교사 인건비 형태로 지원이 시작됐고, 그 다음해엔 원생 가정에 직접 지원금을 주는 형태로 바뀌었다. 재작년 원생 1인당 월 2만2,000원이던 지원액은 지난해 10만 원으로 대폭 늘었다. 이에 따라 아이들도 차차 등원하기 편하고 친구 폭도 넓힐 수 있는 집 근처 일반 어린이집으로 옮기게 됐다.
이주아동 어린이집은 마을도 변화시켰다. 건물을 사들여 리모델링 공사를 할 때만 해도 '외국인이 많아져 괜히 시끄러워지는 것 아니냐'고 수군대는 주민이 많았다. 하지만 머잖아 동네 어른들이 먼저 아이들을 반겨줄 정도로 인기 시설이 됐다. 이 소장은 "폐원 이후 한 할머니가 '요즘은 왜 아이들이 안 보이냐'고 물으시더라"며 "아이들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하던 때가 그립다며 서운해하는 분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지난해 6월 기준 이주아동에게 보육료를 지원하는 기초자치단체는 전국 229곳 중 62곳(27%)이다. 보편적이라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군포에서 전용 어린이집 사업이 시작된 10년 전과 비교하면 크게 늘었다.
이주아동 보육권 보장은 이처럼 조금씩 나아가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우리나라도 1991년에 비준한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모든 아동은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아직 차별의 벽이 높은 게 현실이다.
가장 어두운 보육권 사각지대라고 할 만한 미등록 외국인 자녀는 어떤 지자체에 거주하든 보육료를 전혀 지원받을 수 없다. 한때 불법체류자였던 티하이씨도 정부가 학생 자녀가 있는 이주민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발급하는 임시체류형 비자(G-1)를 2년 전 받고서야 지원망에 들어왔다. 건강보험이 적용돼 가족 치료비 부담이 줄었고, 초등생 성민이는 방과 후 지역아동센터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티하이씨의 다섯 살 막내는 학교에 갈 나이가 아니라서 이 비자를 받지 못했다. 한국에 체류하는 네 가족 가운데 유일한 불법체류자인 셈이다. 군포시의 보육료 지원도 받을 수 없어 티하이씨 월급의 3분의 1인 50만 원이 매달 막내 어린이집 비용으로 들어간다.
합법 체류자라고 사정이 꼭 나은 것도 아니다. 올해로 6년째 배우자 비자로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 국적 티란(31·가명)씨는 요즘 돈을 벌고 싶다. 취업이 허용되지 않는 비자 소지자라 남편 벌이로만 생활하는 게 부담인 탓도 있지만,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는 아이에게 배움의 기쁨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이주민 자녀가 어린이집에서 운영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내국인 자녀보다 많은 돈을 내야 한다. 티란씨는 "한국인 자녀는 매달 원비로 16만 원만 내면 되지만, 우리는 보육료 지원을 받아도 40만 원이 나간다"며 "합법 체류자 자녀인데도 한국 아이와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