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나 급한데 입금 가능해요?"… 고령자 노리는 로맨스 스캠

입력
2023.12.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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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감정 이용해 신뢰 쌓은 뒤 사기
고령층 고독 노린 스캠 범죄 증가세
"수법과 유형 교육해 범죄 예방해야"

"개인 파산 신청을 해야 할까요? 제가 너무 바보 같아요."

15일 서울 종로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남성 한모(65)씨는 휴대폰으로 몇 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연신 눈물을 닦았다. 그는 이성의 관심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이른바 '로맨스 스캠'의 피해자다. 올해 7월 자신을 '호주에서 온 46세 여성'이라고 소개한 이로부터 텔레그램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상대는 매일같이 한씨에게 안부를 물었고, 여가 활동 사진은 물론 끼니 사진까지 실시간으로 공유했다.

그 '여성'은 점차 연인끼리나 쓸 법한 호칭을 써 가며 한씨에게 접근했다. 친분 관계가 꽤나 쌓일 무렵인 지난달, 여성은 대뜸 "하루 3% 이상의 수익이 난다"며 한씨에게 가상화폐 애플리케이션(앱) 투자를 권유했다. 4개월간 신뢰를 쌓은 한씨는 고민 끝에 투자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곳곳에서 대출을 받은 1억2,000만 원을 송금했지만, 여성은 그 순간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 한씨는 "내가 일을 당하고서야 '로맨스 스캠'이라는 범죄를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서울 혜화경찰서가 한씨 사건을 조사 중이다.

청년층을 주로 노리던 로맨스 스캠 범죄가 60대 이상의 고령층으로 표적을 옮기고 있다. 로맨스 스캠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친분을 쌓은 후 연인 관계를 맺은 것처럼 호감을 쌓아 상대에게 돈을 뜯어내는 범죄다. 전문가들은 이 신종 범죄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층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로맨스 스캠은 새로운 유형의 범죄는 아니다. 21일 국가정보원 국제범죄정보센터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로맨스 스캠 피해 사례는 281건에 달했다.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접수된 피해 금액도 48억6,000만 원에 달할 정도. '보이스피싱'처럼 사이버 사기 범죄의 주요한 형태로 분류된다.

문제는 갈수록 SNS 사용이 늘어나는 고령층으로 피해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 7월 경기 고양시에서는 공무원 출신 A(60)씨가 채팅앱으로 만난 여성으로부터 "자녀 수술비가 필요하다"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연금 수급액 5,000여만 원을 보내려 했다가 이를 발견한 은행 직원의 신고로 피해를 면했다. 4월엔 자신을 미군이라고 속여 B(60)씨로부터 1,300만 원을 받아낸 후, 2,000만원을 추가로 뜯으려한 조직원들이 사기미수 혐의로 징역 1년4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고령층 SNS 이용률이 높아지면서 이런 일은 더 자주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간한 '인터넷 이용 실태조사'에 따르면 60대의 SNS 이용률은 2018년 32.5%에서 2022년 45.3%로 증가했다. 반면 고령층은 SNS를 통해 '연애 감정'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로맨스 스캠 범죄자들은 범죄 유형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외로움이나 공허함을 느끼는 노인의 특성을 잘 알고 깊이 파고든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로맨스 스캠을 비롯한 사이버 사기 범죄의 양상을 고령층에 세밀하게 교육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로맨스 스캠은 젊은이들에 비해 부유하지만 범죄에는 취약한 노인을 대상으로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며 "수법과 유형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 범죄 피해자들을 다수 변호한 곽준호 법무법인 청 대표변호사는 "젊은 세대는 로맨스 스캠을 시도 당할 경우 미리 차단하거나 신고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령층은 상대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경찰과 은행 등 기관에서 기민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전유진 기자
최현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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