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중공업 등은 일제 강제동원 한국인이 입은 정신적 피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12월 21일 대법원 판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에 명백히 반한다."(대법원 판결 직후 일본 정부 대변인 성명)
21일 대법원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강제징용 2차 소송)을 인정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미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끝난 얘기'라며 수용 불가 입장을 밝혔다. 박정희 정부 때 체결된 청구권 협정은 한국이 무상자금과 차관을 받는 대가로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이 협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보는 입장이어서, 강제징용 1차 소송(일본제철)에서처럼 이번에도 일본 측의 직접 배상이나 사과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양측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상황에서 결국 한국 정부가 빼든 카드는 '제3자 변제'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정부가 배상금을 법원에 대신 공탁한다는 것이다. 공탁이란 현금 등을 법원의 공탁소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피해자들이 공탁금을 수령하면 배상 판결은 완성된다. 이날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이번에 승소한 피해자들에게도 제3자 변제안이 적용되느냐’는 질문에 "제3자 변제 해법을 적용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문제는 피고(손해배상 주체)도 아닌 제3자(정부)에 의한 변제 방식을 법원이 전혀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일보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9월 15일까지 법원의 공탁관이 피해자지원재단의 공탁을 거부한 사례는 △수원지법(지원 포함) 5건 △전주지법·광주지법 각 2건 △서울북부지법·창원지법·춘천지법 강릉지원 각 1건 등 총 12건이다. 현행법상 제3자가 판결금을 대신 변제할 수는 있지만, 강제동원 피해자(채권자)들이 정부의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 이상 공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취지다.
재단은 공탁관 판단에 불복해 이의신청을 제기했지만, 이마저도 인정받지 못했다. 공탁관 판단을 검토한 법관들도 재단 측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각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측이 변제안 수용 거부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시했기 때문에 공탁관이 이를 근거로 공탁 불수리 결정을 한 건 심사권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각 재판부는 제3자 변제 자체도 적법하지 않다고 봤다. 전주지법 강동극 판사는 "재단은 변제와 관련한 법률상 이해관계가 전혀 없다"며 "재단과 피공탁자(강제징용 피해자)의 의사가 충돌할 경우 재단의 입장을 우선시킬 이유가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부 법관들은 가해기업이 지금껏 사과 없이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점도 주목했다. 광주지법 강애란 판사는 "위자료는 인격적 모욕 등 불법 처사에 대해 피해자를 심리적·감정적으로 만족시키는 기능도 있다"며 "가해기업이 불법행위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상황에서 재단이 판결금을 변제한 이후 가해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가해기업에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결과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재단 측은 각 지방법원의 결정에 불복해 항고한 상태다. 피해자 측 법률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재단이 항고이유보충서를 냈지만 1심 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다"고 말했다. 결국 제3자 변제안의 적법성은 재항고를 통해 대법원에 가서야 결론 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