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3일 새벽.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측에 섰던 제1공수여단(반란군)이 군 수뇌부 제압을 위해 국방부 청사에 난입했다. 전역을 3개월 앞둔 '말년 병장' 정선엽(23)은 육군본부 B2 벙커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초병들은 반란군 앞에 투항했지만, 정 병장은 "중대장님 지시 없인 절대 총을 넘겨줄 수 없다"며 버티다 특수부대 총에 맞아 전사했다. 정 병장은 12·12 군사반란 과정에서 국방부를 지키다 전사한 유일한 희생자였으며, 사태 전체로 확대해 봐도 김오랑 중령(특전사령관 비서실장)과 함께 반란 진압 중 전사한 유이한 인물이다.
44년 세월이 흘러 반란 주모자 신군부 세력들이 대부분 법의 처벌을 받고, 정 병장의 죽음 역시 '순직'에서 '전사'로 격상(지난해)됐지만, 이 나라는 반란군으로부터 군의 심장을 수호하는 과정에서 군인정신을 지켰던 유일한 희생자에 대한 배상 책임을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다.
11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 병장 유족들은 정 병장의 사망 경위를 정확히 규명하지 않았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 소송에서 국가는 오히려 '유족에게 위자료를 주면 이중 배상의 우려가 있다'는 논리로 유족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02단독 재판부가 사건을 심리 중이다.
이 소송은 지난해 3월 국방부 산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정 병장 죽음을 검토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위원회는 "반란세력에 대항한 정 병장의 명예로운 죽음을 군이 '오인에 의한 총기사고'로 조작했다"고 결론 내리고 군에 사망 분류 정정을 촉구했다. 같은 해 12월 전사 확인서가 유족에게 전달됐지만 정 병장을 유독 아꼈던 큰형 정훈채(71·선교사)씨는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정씨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반란의 정점이었던 전두환의 죄목에 초병살해죄(사형 또는 무기징역)가 있었다"며 "국가를 위해 생명을 던진 정선엽의 희생을 전사로만 바꾸면서 끝내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이 사건 재판에서 국방부는 "전사자 분류에 따른 배상 체계가 이미 존재하기에, 별도의 위자료 청구는 현행법상 '이중배상 금지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또 "과거 부실수사에 따른 가족의 고통이 입증된다 하더라도, 그 손해의 발생일은 진상규명위 결정이 있던 지난해 3월 21일부터"라는 논리도 폈다. 유족들을 대리하는 김정민 변호사는 "정 병장 어머니는 사건 진상도 모른 채 2008년 돌아가셨는데, 국방부 말대로라면 아무런 고통 없이 떠나신 셈이냐"고 꼬집었다.
국방부의 궤변은 12·12 군사반란의 또 다른 희생자 김오랑 중령 유족의 가슴도 할퀴었다. 김 중령은 제3공수여단(반란군)이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고 할 때, 사령관을 지키다가 전사했다. 김 중령 조카 김영진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국가에 외면받으며 죽음의 경위를 밝히고자 노력했던 유족들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정훈채씨에게 동생 선엽씨는 늘 희망이었다. 정씨는 가정형편상 상고를 졸업한 뒤 은행에 근무하며 정 병장 등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형제는 12·12 일주일 전에도 통화를 했다고 한다. 정씨는 정 병장에게 "제대하고 대학 졸업하면 형이 미국 유학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단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을 무단으로 체포하고 국방부와 특전사령부를 침탈한 신군부의 반란 탓에, 형제의 바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스물셋 한창의 동생을 잃은 정씨는 교회에 몸을 의지해 선교사가 됐고, 전두환 얼굴이 TV에 나올 때마다 분노로 치를 떨던 정 병장의 어머니는 치매를 얻어 세상을 떠났다.
정 병장 유족들의 1심 결과에 따라, 김오랑 중령 유족들도 추가 소송을 기대해볼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초 이달 4일 기일을 끝으로 선고를 앞두고 있었으나, 국가가 변론 재개를 요청하면서 다음 달 15일 추가 기일이 잡혔다. 다만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공언했던 국가배상법 개정안(순직 군경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해, 국가배상 소송을 지휘하는 법무부가 진의와 달리 국방부의 '이중배상 금지' 논리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동생을 먼저 앞세운 정훈채씨는 1995년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을 때, 이 나라에 대한 기대를 모두 내려놓았다고 했다. 그러다 지난해 동생의 전사 결정과 최근 영화 '서울의 봄'에 보여준 시민들의 관심 덕분에 다시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정씨는 "국가가 죄지은 사람을 벌 주는 게 당연하듯, 의로운 이를 치하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