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하림이 홍대에서 가면 쓰고 버스킹했던 이유

입력
2023.12.15 11:00
12면
[김지은의 ‘삶도’ 시즌2 : 실패연대기] <23>뮤지션 하림
오랜 소속사 ‘미스틱스토리’와 올해 결별
3년 전 ‘그쇳물’ 이어 올해 ‘우사일’ 발표
‘출국’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에서
‘노동의 실패’를 노래하기까지...하림의 여정

“저, ‘우사일’ 같은 노래 부르려고요.”

올해 하림(본명 최현우·47)은 오랜 소속사 미스틱스토리에 이렇게 말했다. 12년 인연에 안녕을 고하는 선언이었다. 그는 이 회사의 ‘원년 멤버’다. 올 6월, 그렇게 그는 ‘산업’을 떠났다.

노래를 부르려고 소속사를 나간다니. 그럼 ‘우사일’은 어떤 노래인가.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의 약자다. 그가 만든 노래다. 올해 9월 공개했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담았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내가 일하다 다치면 엄마 가슴 무너지고요/집에 못 돌아가면은 가족은 어떡합니까”(‘우사일’ 중에서).

‘우사일’에 앞서 ‘그쇳물’이 있다. ‘그쇳물’은 ‘그 쇳물 쓰지 마라’의 약자다. ‘그쇳물’은 2010년 9월 충남 당진의 한 철강회사에서 일하다 1,600도가 넘는 쇳물에 추락해 죽은 20대 노동자의 넋을 기린 곡이다. ‘댓글시인’ 제페토가 남긴 추모 시에 하림이 2020년 곡을 붙였다.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사망 사건’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때다.

‘그쇳물’ 전엔 ‘국경 없는 음악회’가 있다. 이주노동자 무료진료소 ‘라파엘클리닉’에 하림이 만든 무대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무대에서 모국의 노래를 불렀다. 하림은 그들의 얘기를 듣기도 하고 반주도 했다. 때론 함께 춤을 췄다. 마이크를 잡은 노동자도, 무대를 보는 노동자들도 울면서 웃었다.

‘국경 없는 음악회’ 앞서선 문화기획자 하림이 있다. 아프리카를 담은 공연을 하고 관객의 기부금을 모아 아프리카의 뮤지션 지망생들에게 기타를 보내주는 ‘기타 포 아프리카’ 같은 프로젝트를 여럿 했다.

그전엔 홍대 음악 카페 무대에서 월드 뮤직(각 나라의 고유한 음악)을 공연한 하림이, 그보다도 전엔 홍대 거리의 버스커 하림이 있다.

우리는 ‘출국’(1집ㆍ2001년)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2집ㆍ2004년)로 그를 떠올리지만, 그 시기는 그에게 ‘실패’로 기억된다. “산업 안에서 ‘복권 당첨’을 기다리면서 ‘혹시 이번엔 내 차례일까’를 되뇌던 내가 부끄러웠어요. 마치 치킨집 하나 열고서 ‘(주식회사) 하림 같은 기업이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죠.”

화려한 무대를 떠나 거리로 간 이유다. 그는 ‘하림’을 벗고 가면을 쓴 채 음악만으로 관객을 만났다. 악기 상자를 열어 만든 ‘팁 박스’에 어느 날은 몇만 원이, 어느 날은 5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달랑 들어 있었다. 조명, 음향, 카메라, 소속사, 방송사 같은 중간 단계 없이 마음에 직결되는 음악, 그렇게 완성되는 음악의 가치를 그때 처음 느꼈다. 그가 걸어온 시간은 ‘음악이 뭐지? 노래의 가치는 뭐지?’의 답을 찾아온 여정이다.

그 길을 돌아보며 그는 말했다. “음악의 목적은 조각난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유별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노래가 지닌 본래 역할을 회복하려고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그쇳물’과 ‘우사일’로, 노동의 실패를 노래하는 게 그래서다. “20년 동안 음악은 제게 천천히 존재의 이유를 이야기했죠. 노래가 떨어뜨려 놓은 빛나는 돌들을 주우며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음악을 매개로 이야기하는 예술가’ 하림을 6일 만났다.

[실패①] 가면 쓰고 버스킹한 이유

-왜 가수가 됐나요.

“어릴 때부터 꿈이었죠. 어머니가 시켜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어요. 작곡도 하기 시작했죠. 친구들과 내가 만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요. 아버지가 군인이셔서 전학이 잦았는데도 그 덕분에 교우 관계가 좋았죠. 중학교 2학년 때 수련회에서 ‘롤링페이퍼’를 썼는데, ‘나는 가수가 될 거야’라고 적은 기억이 나요. 고등학교 땐 록밴드 동아리 활동을 했죠.”

그는 스무 살 때 그룹 VEN으로 데뷔했다. 기획사와 계약을 하고, 계약금은 멤버 셋이서 나눠 악기도 샀다. 그의 포지션은 원래 키보드였지만, 막판에 보컬을 맡은 멤버가 팀을 떠나는 바람에 그가 보컬을 하게 됐다.

-VEN 시절은 어땠나요.

“1년 정도 활동했는데 힘들었죠. 엔터테인먼트 산업 시스템이 지금보다 훨씬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시절이니까. 가수가 되고 싶은 청춘들과, 그들의 열망을 이용해 한몫 챙기려는 세상이 존재했어요. 무서웠죠. VEN은 실패했어요.”

그 뒤 공군 군악대로 입대했다. 그는 국군홍보관리소(현 국방홍보원) 소속이었다. ‘작곡병’이었던 윤종신씨의 후임을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 지원했다. 어느 날 윤종신씨가 그에게 말했다. “제대하면 나랑 계약하자. 내가 앨범 내줄게.” 그렇게 2001년 첫 앨범이 나왔다.

-1집부터 잘됐고, 2집까지 쭉 성공했지요.

“그렇게 많이들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회사에서 수익을 회수할 수 없는 수준이었죠. 2집까지는 겨우 만들었는데, 3개월쯤 활동하고 접었어요. 회사에서 더 이상 홍보를 할 수 없다고 했죠.”

-실망했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때는 ‘잘됐다. 어차피 재미도 없었는데’라고 생각했어요. 당시가 ‘홍대 인디신’의 태동기였거든요. 인디 가수들이 참 행복해 보였어요. 산울림 소극장 맞은편에 작업실을 만들었죠. 가수 활동 말고도 곡을 써주거나 연주를 하거나 방송음악 만드는 아르바이트로 돈은 벌었으니까. 그때 버스킹을 했어요. 가면을 쓰고 연주를 했죠.”

-버스킹도 놀라운데, 가면까지 쓰고 했다고요. 왜 그랬나요.

“2집 앨범에 실패하고 나서 ‘여행이나 가자’해서 베니스에 갔어요. 베니스에선 오페라 가면을 여기저기에서 팔거든요.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고요. 당시 드렐라이어(허디 거디)라는 유럽의 민속악기를 배우고 있었어요. 가면을 쓰고 이 악기를 연주하는 버스킹을 하면 좋겠다 싶었죠.”

-가면을 쓰고 버스킹을 해보니 어땠나요.

“돈과 예술의 상관관계를 많이 느꼈죠. 악기 상자를 팁 박스로 두고서 가수도, 하림도 아니고 내 음악과 퍼포먼스로 돈을 벌었어요. 내가 하는 한 시간짜리 음악 공연은 똑같은데 이 음악이 연주되는 무대가 커지면 커질수록 여러 구조가 붙고 그게 산업이 된다는 걸 깨달았죠. 음악과 산업이 구분되더라고요. 내가 음악을 해서 힘든 게 아니라 음악 산업 속에 있어서 힘들었다는 걸 알았죠.”

그다음 그의 무대는 어쿠스틱 공연을 할 수 있는 홍대의 카페였다. 거리에서 ‘지붕이 있는’ 무대로 올라온 거였다. 당시 한창 배우던 월드 뮤직을 연주했다. 그가 말했다. “얼마 전 아내가 ‘리즈 시절’(전성기)이 언제냐고 묻는데, 제가 그때라고 했어요. 아내가 놀라면서 (TV 예능 프로) ‘무한도전’이나, ‘비긴어게인’에 출연한 때가 아니냐고 되묻더라고요. 돈도 없고, 스케줄도 없지만, 매일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들과 음악 얘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들이 노래가 돼서 어느 날 누군가의 입에서 발표가 되던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TV에선 사라졌지만, TV 밖에서 그는 왕성했다. 2010년엔 예술창작기획집단 ‘아뜰리에 오’를 만들었다. 그 시기 했던 작업 중 하나가 ‘도하 프로젝트’다. 개발논리로 도시의 유목민이 된 예술가들과 새로운 예술 생태계를 만든다는 취지였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서울 금천구의 옛 도하부대 자리에서 시작했다. ‘천변살롱’ 같은 음악극으로 스토리텔링을 하기도 했고, 2014년엔 국제앰네스티와 예술을 도구로 한 인권운동 ‘시크릿 액션’에도 동참했다. 그의 주제는 음악 산업 속에서 했던 사랑과 이별에서, 사람과 세상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그런 활동들을 하면서 ‘나는 왜 노래를 하는가’라는 자문도 했을 것 같아요.

“1, 2집을 냈던 시기엔 외로웠어요. 내가 노래하는 목적 자체가 ‘히트’였으니까. 매니저와 차를 타고 어딘가에 가서 노래를 한 뒤 내 자랑을 잔뜩 늘어놓으며 멋진 포즈를 취한 뒤 집에 왔죠. 노래가 내 직업인지, 생계수단인지, 투자인지 모호했어요. 단지 나도 TV 속 가수들처럼 화려하게 노래하고 싶었죠.”

-그때는 스타가 되고 싶었던 거군요.

“그럼요. 그땐 그걸 인정하지 않았어요. 돌이켜 보니 결국 그것을 위한 연속이었죠. 그래서 외로웠던 거예요. 목적 자체가 너무 단편적이니까. 홍대에서 나는 회복됐어요. 꿈이 더럽혀지지 않은 음악 친구들 사이에서.”

-홍대에서 버스킹을 하고 카페에서 공연하던 때가 전환점이네요.

“그때 노래하는 이유가 입체적으로 바뀐 거죠. 버스킹할 때 나와 관객 사이엔 팁 박스 하나뿐이었어요. 그래서 자유롭고 행복했죠. 그 팁 박스가 커지면 산업이 되는 거예요. 당시 친구들과 이런 얘기를 나눈 기억이 나요. ‘우리의 회사는 음악이야. 우리를 먹여 살려주는 건 소속사 같은 회사가 아니라 음악이잖아.’ ‘음악으로 먹고살 수 있는가’라는 게 음악하는 사람들을 참 비참하게 만드는 질문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괴로운 건 음악이 아니라 산업 때문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죠.”

[실패②] 노동의 실패를 노래하다

-그래도 그땐 사회 문제를 대놓고 노래하진 않았는데, ‘그 쇳물 쓰지 마라’를 만든 계기가 있나요.

“길게 보면 라파엘클리닉에서 했던 ‘국경 없는 음악회’가 계기죠.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국경 없는 음악회’를 했어요. 월드 뮤직을 공부하면서 이주민들에게는 자기 나라의 음악이 곧 정체성을 지키는 도구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기획했죠.”

-어떤 공연인가요.

“한 달에 한 번씩 점심 시간에 가서 그날 노래 부를 사람을 모집해요. 저는 미리 그날 마이크를 잡을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은지 받아서 MR을 만들거나 반주를 준비하죠. 무대에서 그 사람에게 마이크를 준 뒤에 한국에 왜 왔는지 사연을 듣고 어떤 노래를 할 건지, 왜 그 노래를 부르고 싶은지 들어요. 모국어로 인사와 함께 가족에게 전하는 말도 할 수 있게 하고요. 그런 뒤 노래를 듣는 거죠. 그 모습을 영상으로도 찍어요. 모국의 가족에게도 보낼 수 있게.”

-분위기가 어떤가요.

“라파엘클리닉엔 캄보디아, 아프가니스탄, 가나, 에티오피아, 파키스탄, 이집트··· 다양한 나라에서 와서 다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어요. 마이크를 잡은 사람의 얘기와 노래를 듣다 보면 다들 눈물을 흘려요. 타국에 와서 일을 하다 보면 외롭고 지칠 때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곳에서 함께 노래 부르는 게 그들에겐 치유인 거죠. 노래로 얻는 에너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이었어요. 굉장히 아름다운 자리죠.”

-‘국경 없는 음악회’로 많은 걸 느꼈겠어요.

“너무 많죠. 음악은 사람들이 힘들 때 큰 힘을 발휘해요. 월드 뮤직을 공부하면서 배웠죠. 음악이 흐르는 방향은 전쟁과 반대예요. 승자는 패자의 돈과 땅을 갖지만, 음악은 패자의 것이 퍼지죠. 아프리카 음악이 아메리카로 갔지, 아메리카 음악이 아프리카로 가진 않았잖아요. 음악이 가진 아름다운 속성이에요. 그 깨달음은 VEN이나 하림 1, 2집으로 얻은 게 아니라 그 실패 이후의 시간으로 얻었죠.”

-그 깨달음이 ‘그쇳물’로 이어진 건가요.

“사실 2010년엔 당진 철강회사에서 일어난 참사를 몰랐어요. 그런 사안에 큰 관심이 없었죠. (10주기가 되는) 2020년 ‘프로젝트퀘스천’이라는 회사에서 제게 이메일을 보냈어요. 제페토의 시 ‘그쇳물’을 음원으로 만들고 싶다고요.”

프로젝트퀘스천은 사회 문제를 발굴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이다.

-제안을 받고 어땠나요.

“일단 만나서 얘기나 들어보자는 심산으로 보기로 했어요. 속으로는 거절할 생각을 하고 나갔죠. 그땐 내 일이 아니라고 여겼거든요.”

-거절을 했나요.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 사건 자체가 너무 잔인한 거예요. 그래서 ‘확답은 못 하지만, 고민해볼게요. 음악이 나오면 알려드릴게요’라고 답하고 헤어졌죠. 그때까지 ‘노동운동’이라고 하면 무섭게 생각했거든요. 부끄러운 얘기인데, 그때는 ‘노동자’라는 단어도 안 썼어요. ‘근로자’라고 했지. 사측의 표현이라는 걸 몰랐어요.”

-프로젝트퀘스천은 왜 하림씨에게 부탁을 했을까요.

“이미 그전에 뮤지션 20~30명한테 제안을 했는데 다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요.”

-노래는 언제 나왔나요.

“몇 달간 고민을 했어요. 곡이 나와서 연락을 했죠. 그런데 제가 부르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더라고요. 난 이미 ‘국경 없는 음악회’의 경험이 있으니까. 그래서 프로젝트퀘스천에 이렇게 제안했죠. ‘이 노래는 함께 불러야 해요. ‘우리끼리’가 아니고 여러 사람이 함께.’ 그래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 릴레이로 부르는 ‘그쇳물 챌린지’를 시작했죠. 다음 부를 사람을 지목하는 폭력적인 방식 없이.”

챌린지엔 불이 붙었다.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물론 장혜영 정의당 의원, 가수 호란 같은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 동참했다. 덩달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관심도 커졌다.

-어땠나요.

“어리둥절했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가 서는 무대도 확 바뀌었다. 집회, 파업 현장, 노동자 단체 행사로.

[실패③] ‘우사일’이 건넨 물음표

-‘우사일’은 ‘그쇳물’의 후속처럼 느껴져요.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누구든 흥얼거렸을 때, 내가 존엄한 존재고 내가 하는 일로 무시당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어요. 조직이라는 힘조차 없는 사각지대의 노동자를 위한 노래요.”

그는 지난해 곡을 완성해 올해 9월 5일 악보와 함께 공개했다.

-‘그쇳물’이나 ‘우사일’은 모두 말하는 듯해요. 만드는 과정이 어땠나요.

“작곡가마다 자기 스타일이 있어요. 저는 언젠가부터 말의 억양이 멜로디의 단서라고 생각했어요. 노랫말을 계속 말해요. 그대로 따라가서 정리하면 말과 가장 유사한 형태로 멜로디가 만들어져요. 가장 배우기 쉽고 원시적이고 자연스러운 작곡 방법이죠. ‘그쇳물’과 ‘우사일’은 그걸 극대화해서 곡을 만들었어요.”

-‘우사일’은 글도 직접 썼죠.

“’우사일’은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만들었어요. 자극적인 요소를 빼려고 노력했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공기처럼 들리게 하고 싶었어요. 누군가 흥얼거리든,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삼삼오오 모여서 계단에서 노래하든, 주방에서 우리끼리 집회를 하든 자연스럽게 부르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우리는 모두 다 일을 하는 사람, 우리는 모두 다 똑같이 소중한 사람,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한다’는 노동의 기본을 노래해요.

“각자의 해석대로 생각하면 돼요.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에는 두 가지 뜻을 담았어요. 일이라는 게 외부적으론 타인에게 기여하는 행동이라는 의미예요.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는 일도, 결국은 그 커피를 마시면서 행복해할 그 사람의 삶에 기여하는 것이죠. 그런 생각을 하면 일을 할 때 덜 괴롭지 않을까요. 두 번째는 나를 위해서 일한다는 뜻을 담았어요. 보통 우리가 ‘회사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데 그건 사용자 입장이죠. 내 입에서 ‘사용자’라는 단어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만. (웃음) 어쨌든 회사는 우리를 사용하고 그 대가를 지급하는 곳이지, 본질적으로 우리는 나를 위해서 일을 하는 거죠. 나와 일 사이에 회사가 있는 거고요.”

‘우사일’의 단순한 가사를 읊조리다 보면 부를 때마다 의미가 깊어진다. 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우사일’을 공개하면서 챌린지도 시작했다. 그가 SNS에 올려놓은 악보를 다운로드해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촬영하고 챌린지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업로드하는 방식이다.

-‘우사일’ 챌린지는 어땠나요.

“실패했다고 봐야죠. ‘그쇳물’엔 참사라는 뚜렷한 서사가 있었고, 중대재해법 같은 이슈와 맞물려서 사회운동의 성격이 됐어요. 그런데 ‘우사일’은 ‘그쇳물’에 비하면 관심이 적었죠. ‘이것이 우리의 숙제구나’ 싶었어요. 누군가 죽고 다쳐야 ‘이게 우리 이야기구나’ 생각을 할까. 이런 물음표가 남았죠. 하지만 이 실패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해요.”

-‘우사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나요.

“변화는 쉽지 않죠. 그러나 오지 않는 건 아니에요. 변화는 날씨처럼 온다는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어느 날 계절은 바뀌어 있잖아요. 실패나 성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변화가 어떤 계절에 오는지가 중요한 거죠.”

-‘우사일’을 음원 사이트에 안 올린 이유가 있나요.

“이런 소리 듣기 싫어서요. ‘그거 해서 하림이는 음원 수익으로 얼마나 벌까’ 하는. 그런 댓글을 봤거든요. 그럼 안 하면 되지. 저작권료? 저작권도 등록 안 하면 되지. 사람들이 내가 가수라서 갖는 오해가 있으니까요. ‘우사일’ 같은 프로젝트로 내가 다른 부가적 이미지를 얻을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죠. 물론 이런 일이 내가 건강한 자아를 만들고 정의로움을 쌓아갈 수 있도록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우사일’을 함께 부르는 공간에 있으면 어떤가요.

“울컥하죠. 마지막 가사는 관객이 부르도록 유도하거든요. 세 번을 반복하는데 그럼 마지막에는 정말 소리가 우렁차져요. 뿌듯함이 밀려오죠. 일단 오늘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한다’고 전했구나. 갈 땐 힘든데, 올 땐 그래서 행복해요.”

그가 ‘우사일’을 공개한 뒤 벌인 일이 하나 더 있다.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비용에 보태려는 뜻으로 시작한 ‘100명의 아카이빙 챌린지’다. ‘나는 사랑하는 OOOO을 위해 일을 합니다’라는 문장을 쓴 종이를 들고 사진을 찍은 뒤, 챌린지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공유하는 방식이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그간 공연료로 받은 돈에서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기금으로 100만 원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사람들의 참여 속도가 생각보다 더뎌 초반에는 당황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챌린지의 취지에 동의하는 이들이 기부 행렬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좌절할 필요도, 낙담할 이유도 없다. 계절은 끝내 바뀌고야 마는 법이니까.

[실패란] ‘밖’에서 진짜를 만났다

-소속사였던 미스틱스토리와는 계약을 종료한 거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산업 밖에 더 많이 있으니, 좀 더 자유롭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선언하고 그만뒀어요. 고민이 많았지만 정리가 됐죠. 진짜는 바깥에 있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그간 고민하면서도 적을 정리하지 못한 데엔 ‘심리적 보험’의 이유도 있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데 그게 부끄럽더라고요. 내 차례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산업 안에 있으면서 ‘혹시 이번엔 내 곡이 성공할까’라고 바라는. 하지만 그런 차례는 모두에게 다 오지 않아요. ‘비긴어게인’으로 다시 주목받을 때 주위에서 ‘너 지금 앨범 내야 해’라고 많이들 설득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산업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앨범을 내면 또 방송사 다니면서 노래 부르고 ‘이번 앨범 콘셉트는···’ 이런 얘기를 해야 할 텐데, 이제 제게 그런 일들은 중요하지 않게 됐어요.”

-대신 산업 안의 사람들이 서지 못하는 무대에 서고 있죠.

“맞아요. 그래서 행복해요. ‘그쇳물’ 때는 전남 여수의 초등학생들이 불러서 간 적이 있어요. 아빠가 석유공장에서 일하는 어린이들이죠. 안 갈 수 없잖아요. 한 달에 굵직한 (노동) 행사는 네다섯 군데, 소소하게는 열 군데씩 다니기도 하죠. 저 같은 사람(뮤지션)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요즘 그의 ‘로드 매니저’는 아버지다. 퇴직한 아버지에게 그는 개인 택시를 마련해 드렸다. 서울에서 일정이 있을 때면 아버지가 그를 태우고 다닌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그랬다.

-요즘 공연하는 무대가 다양해졌는데 부친의 반응은 어떤가요.

“좋아하세요. 물론 ‘비긴어게인’ 때 행복해하셨지요. 방송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플랫폼이에요. 하지만 내가 그 일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현장에서 부르는 노래를 더 좋아하게 됐죠. 그게 더 진짜 같은 느낌이 드니까. 전파를 통해서가 아니라 눈앞에서 하는 노래. 그런 현장에 갈 때 제가 편안해하고 즐거워하니 아버지도 좋아하세요. 오가면서 차 안에서 얘기도 나누고 함께 밥도 먹을 수 있으니 그것도 좋고요.”

-지금까지 경험한 실패를 바탕으로 ‘실패’라는 단어를 정의한다면 뭘까요.

“실패란 그냥 실패일 뿐이다. 실패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실패하니까.”

-실패를 통해서 길어 올린 ‘삶의 도’가 있다면 뭔가요.

“얼른 정리하고 넘어가자. 다시 생각하지 않아요. 실패했으면 그 상자는 닫고 다음 준비된 상자를 열어야 하죠. 대신 저는 늘 최악을 생각하고 다른 상자들을 준비해둬요.”

내게 가수 하림은 곧 ‘출국’이자,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였다. 알고 보니 그는 화려한 성공을 꿈꿨으나 실패한 신인 가수였고, 가면 쓴 거리의 버스커였으며,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로 예술이 지닌 선의지(善意志)를 증명하는 문화기획자이기도, 음악으로 치유를 돕는 힐러이기도 했다. 지금은 자신을 뭐라고 규정하는지 궁금했다.

“음악을 매개로 이야기하는 예술가죠. 저는 예술이 세상을 좋은 쪽으로 변모시키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예술을 나쁘게 이용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예술엔 그런 힘이 있죠. 예술가에게도 기본적으로는 세상을, 사람을 좋은 쪽으로 변모시키려는 의지가 있다고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는 모든 활동은 그걸 향하고 있죠. 예술가는 그래서 직업이 아니라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간의 여정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최근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노래하러 가는 것인가, 노래가 나를 부르는 것인가’. 내가 노래를 따라다니는 거더라고요. 20대부터 노래가 어떤 숲길을 앞서가면서 돌들을 두었고, 저는 음악을 하면서 그것들을 주워 담았죠. 어떤 돌은 빛났지만, 어떤 돌은 보잘것없는 돌멩이이기도 했어요. 때론 돌이 안 보여서 길을 잃기도 했고요. 그게 음악가가 하는 일인가 봐요. 노래가 흘린 빛나는 돌을 주우러 다니는 것.”

그의 안엔, 지금껏 주운 돌 중 가장 빛나고 예쁜 것들이 가득할 것이다.


편집자주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김지은 버티컬콘텐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