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0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24세 비정규직 하청노동자 김용균씨가 숨졌다. 늦은 밤 홀로 석탄 이송용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다 설비에 끼여 머리와 몸통이 분리돼 사망했다.
사고 직후 엄마 김미숙(53) 김용균재단 대표가 회사로부터 들은 말은 '용균이가 가지 말라는 곳에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하다 죽었다'는 책임 전가였다. 그러나 진상 규명을 위해서 꾸려진 '김용균 특별조사위원회'에서 748쪽 보고서로 밝힌 사실은 '명백한 원·하청의 안전관리 부실 책임'이었다.
현실의 벽은 아직 높다. 용균씨를 죽음으로 내몬 원청 한국서부발전과 하청 한국발전기술의 책임자들은 7일 대법원에서 줄줄이 집행유예나 무죄를 받았다. 김 대표는 "원청 전 사장이 현장을 잘 몰랐다면 그만큼 안전에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 아니냐. 근데 무죄면 앞으로 다른 사업주가 아무리 많은 사람을 안전보장 없이 죽여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용균씨와 같은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게 산재 사망 유족들이 함께 나서 만든 법이 '중대재해처벌법'이었다. 김 대표도 아들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고 적극 동참했다. 그러나 최근 경영계의 요구에 정치권이 부응하면서 산재 사망의 80%가 발생하는 50인 미만 기업에 대한 전면 적용은 2년 더 유예될 위기다. 김 대표는 "중처법을 아예 무력화하겠다는 것이고, 법안에 동의한 72%의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들의 죽음 후 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용균이처럼 위험하게 일하는 청년'들이 눈에 밟혀 노동 현장을 떠날 수 없다는 그를 용균씨 생일(12월 6일) 하루 전이자, 대법원 선고를 이틀 앞둔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에서 만났다.
태안화력발전소는 아들의 첫 직장이었다. "(경북 구미에서 충남 태안으로) 타지로 가서 기숙사에 들어간다고 하니까 밥은 잘 챙겨 먹을지, 선배들이랑 어울려 잘 지낼 수 있을지, 일은 잘 배울지나 걱정했지 그렇게 위험한 곳일 거라고는 생각을 전혀 못 했죠."
안전 시스템은 총체적 부실이었다. 2인 1조 규정은 지켜지지 않았다. 위험 시에 컨베이어벨트를 멈추는 풀코드(비상정지장치)가 있었지만 작동시켜 줄 동료도 없었던 것이다. 사전 교육도 미비했다. "보통 몇 주간 안전교육을 받고 투입돼야 하는 건데, 기존 인원이 빠지는 바람에 용균이가 입사 5일 만에 급하게 현장 투입됐어요." 석탄 분진이 날리고 조명도 없어 앞이 온통 컴컴한 컨베이어 밀폐함 점검구에서, 용균씨는 회사에서 랜턴 하나 지급해주지 않아 휴대폰 불빛으로 시야를 밝혀가며 일했다.
사고 후 머잖아 '김용균법'이라는 별칭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고자 유해·위험 작업의 사내 도급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고 도급인에게 산재 예방 조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골자다. 유가족의 싸움으로 국회에 죽어 잠자던 법을 살려냈다.
2018년 12월 2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앞 복도에서 김 대표는 기자들에게 마이크를 빌려 외쳤다고 했다. "국민이 얼마나 당해야 법을 바꿀 겁니까!" 법이 통과됐다는 기쁨도 잠시, 정작 용균씨 동료들이 일하는 발전소를 비롯해 지하철·철도·조선업 등은 산안법 도급 금지 대상에서 빠진 것을 알게 됐다.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었다.
슬프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위해 산재 유족인 김 대표와 고(故)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씨는 한 달 가까이 단식을 했다. 그리고 2021년 1월 8일 중처법이 통과됐다. 인터뷰 내내 물기 어린 눈이던 그는 통과 당시를 떠올리는 순간만큼은 얼굴에 옅은 빛이 돌았다.
"영국의 기업살인법(중처법 모태)을 산재 사망자 유족이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유족이 앞장서 만든 법이라고. 아, 내가 해야 할 일이 그거구나 했어요. 단식농성 때 (산재 사망자) 유족들이 함께해준 것에 너무 감사했고, 72%(KBS 2021년 신년조사)나 되는 국민이 법안에 찬성해줬다는 게 저에게는 굉장히 큰 힘이었어요. 그때 참… 감명 깊고 고마웠죠."
최근 정부와 여당은 50인 미만 기업에 대해 중처법 2년 유예를 추진 중이다. '준비 미비'를 이유로 법이 통과된 지 5년이나 지난 2026년 1월에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야당마저 조건부 유예 동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국내 전체 사업체 98.8%는 50인 미만 사업장이다. 달리 말해 현재 중처법을 적용받는 사업장은 1.2%뿐이다. 산재 사망 80%는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다.
"이미 법 통과 후 3년의 준비 시간이 있었는데, 2년을 더 미룬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고 봐요. 기업들의 의도는 이 법을 무력화시켜 아무것도 안 하겠다, 이전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거겠죠. 법안에 찬성해주셨던 국민들을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계속 죽고 있고, 지금 다잡지 않으면 이 법은 계속 유예될 수밖에 없어요."
"용균이 같은 노동자가 일하다 죽으면 기업에서 벌금으로 평균 432만 원(2016년 기준)만 내면 됐어요. 내가 죽었을 때 '500만 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 너무 기가 막히잖아요. 나는 내 자식의 목숨이 내 목숨보다 소중한데. 천만금, 억만금을 줘도 용균이랑 비교 자체를 하고 싶지 않은데…"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산안법 개정안이 시행된 2019년 이후에도 평균 벌금액은 692만원이다.
"기업주가 그렇게 (노동자가 죽게끔)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법이 어떻냐에 따라 사람 목숨 몇백만 원하고 안전 투자에 드는 돈을 저울질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죠. 자기 회사에서 사망 사고 나는 게 아무리 싫어도 결국 그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처벌 수위를 높이는) 중처법을 만든 거고,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빨리 적용돼야죠."
역설적이게도, 용균씨를 사고로 내몬 원·하청 책임자들의 재판에는 중처법이 적용될 수 없었다. 중처법 시행 전인 2020년 검찰 기소가 이뤄져서다.
"재판정에서 원청이 그래요. 자기들이 '저기 낙탄(떨어진 석탄)이 쌓였다'라고 말한 것은 지시가 아니라 요청이라고. 사고 현장에 폐쇄회로(CC)TV가 없고, 사고를 목격한 증인도, 물증도 없어서 아이가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고도 했지요. 반대로 말하면 그런 현장을 누가 만들었나요. 본인들이 제대로 안전설비를 마련하지 않은 것을 왜 적반하장으로 용균이 탓을 하는지…"
7일 대법원 선고로 원·하청 책임자들은 줄줄이 무죄나 집행유예를 확정받았다. 원청이 내야 하는 벌금은 없고, 하청 법인은 벌금 1,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사실 대법원 판결 이틀 전 만났을 때 김 대표는 대법원 결과에 큰 기대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1심, 2심, 3심까지 재판을 지속한 이유는 명확했다.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법원이나 정부 인식을 조금씩 바꿔 나가야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법원 가봤자 질 게 뻔해, 이런 무력감이 만연한 사회잖아요. 하지만 저라도 재판을 계속해 사람들에게 '지금의 노동환경과 산업안전 현실은 문제다. 법과 재판도 잘못됐다'고 알려주고 싶었어요."
김 대표는 이 시대 청년들의 모습에서 용균을 본다.
"지난 5년 쉴 새 없이 달려왔죠.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편지도 많이 받고, 현장에서 얘기도 많이 듣고요. 특히 청년들이 자기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위험에서 목숨을 겨우겨우 부지하고 살고 있는지 편지를 보내면, 다 용균이 같은 거예요. 그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아닌가 막 마음이 조급해지고, 아프고, 울다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편지 읽고 그랬어요.
용균이가 졸업 후에 1년간 여러 자격증 시험을 따고, 그다음 7개월 정도 전국 사방팔방 다니면서 취업을 하려고 했어요. 그 오랜 시간 이력서 내고 면접 보러 다니며 '일자리가 이렇게 없구나', '이 위험한 일도 내가 그냥 붙들고 살아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양질의 일자리는 많이 없고, 힘든 일자리는 거의 비정규직 몫이잖아요."
저출생의 현실도 결국 '희망 없는 일터'에서 나온다고 그는 말했다. "제가 용균이에게 '용균아, 너 같은 자식 낳아서 키워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를걸. 너도 한번 그런 기분을 느껴봤으면 좋겠어.' 그랬더니 용균이가 취업 후에 와서 하는 말이 '엄마, 나 엄마처럼 결혼 못 할 수도 있어. 너무 그거 바라지 마.' 비정규직은 나도 못 지키는데 가족을 어떻게 책임지겠냐고, 다 불행해지는 길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이게 용균이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사회가 그러잖아요. 너무 가슴이 아프죠. 아이를 갖고 행복을 꿈꾸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 됐다는 게."
그는 5년째 먼저 떠난 아들을 매일 떠올리며 제 속을 후벼파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나아가는 이유를 물었다.
"좀… 쉽지가 않아요. 자식 잃고 맨날 다니면서 내 아이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얘기한다는 것이. 정말 트라우마 속에서, 계속 그 속을 긁고 있는 상태잖아요. 그럼에도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이런 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면 나의 삶이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특히 용균이에게, 사회가 일터가 안전을 담보해 주지 않아 너는 그렇게 억울하게 갔지만 그래도 엄마가 조금이라도 나서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으면 나중에 엄마 만날 때 서로… 얘기할 것이 있지 않을까 해서…"
오는 10일 용균씨의 사망 5주기를 앞두고 최근 여러 언론 인터뷰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 이번 5주기가, 마지막이라고 생각들 하셔서 그런 것 같아요." 정부와 정치권, 사회의 관심에도 시효가 있을 것이라는 쓸쓸한 말이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산업안전,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김용균, 김미숙은 잊혀서는 안 될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