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 23일 금요일 밤. 독일 축구 월드컵 G조 조별리그 '대한민국 VS 스위스 전'이 열렸다. 앞선 두 경기에서 1승 1무를 기록한 한국 대표팀은 스위스를 이겨야만 16강에 갈 수 있었다. 신문 마감 시간이 아슬아슬했던 터라 당시 한국일보 월드컵 특별 취재팀은 '16강 진출' 호외(號外)판 기사들을 미리 준비했다.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하면 여러 기사들이 쓰레기통에 버려질 처지였다. 그럼에도 수많은 데이터와 해외 언론, 전문가들의 경기 예측을 살핀 결과 스위스는 해볼 만한 상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대표팀은 스위스에 0대 2로 졌다. 호외는 독자들을 만나지 못했지만 우리는 할 만큼 했고 납득이 가는 패배였기에 홀가분했다.
17년 뒤인 2023년 11월 29일 새벽. 대한민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프랑스 파리서 열린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가 진행한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개최지 결정 투표에서 1번 후보 대한민국 부산시는 29표를 얻었다. 투표에 참가한 회원국이 165개 나라니까 득표율은 17.5%에 그쳤다. 약 72%의 표를 얻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크게 졌다.
다른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한국일보도 그날 새벽 투표 결과가 나오는 대로 온라인으로 내보낼 기사를 준비해야 했다. 정치부, 사회부, 산업부의 여러 기자들이 기사 방향을 잡기 위해 출입처를 통해 정보를 모았다. 그 결과 곳곳에서 '박빙 열세지만 역전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 근거를 물으면 하나같이 투표권을 가진 국가들이 마음을 돌렸다고 했다. "결선 투표에서 한국을 밀겠다"고 약속한 나라들이 많기 때문에 1차 투표에서 리야드가 3분의 2 이상 득표하지 못하면 승산이 있다고도 했다. 해외 언론을 봐선 리야드가 질 가능성은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역전승을 말하는 유치위원회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싶었다. 아쉽게 떨어졌을 경우와 함께 결선 투표에서 한국이 이기는 극적인 상황도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막상 투표 결과가 나오자 모두 절망했다. 이런 큰 차이는 예상 시나리오에도 없었다. 이번에도 미리 준비했던 기사들이 쓰레기통으로 가게 됐지만 17년 전에 비하면 납득할 수 없는 결과로 씁쓸한 뒷맛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시 파리에 있던 한 재계 관계자는 "도대체 누가 박빙이라 했는지 모르겠다"며 "이 많은 사람들이 누굴 위해 뛰어다녔나 하는 생각이 들어 허탈했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유치 홍보전 과정을 낱낱이 뜯어봐야 한다. 앞으로 국제 행사나 스포츠 이벤트 등 국가 차원에서 유치전에 나설 때 다시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말이다.
'대통령실-부산시-대한상의' 삼각편대 속에서 누가 어디서 정보를 얻었고 그 정보가 어디까지 전달됐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혹시나 그 과정에서 예산이 필요 없는 곳에 사용됐는지도 따져야 한다. 모 인사가 해외 주요 관계자들을 만난다는 이유로 비싼 레스토랑에서 고급 와인을 물 마시듯 했다는 소문까지 퍼지고 있다. 대통령실의 '희망 고문'에 적극 동참한 대한상의 역시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 많은 대기업이 대한상의 정보를 바탕으로 수백억 원을 들여가며 세계 곳곳에서 부산을 알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산업부장으로서 더 꼼꼼하게 정보를 모으고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지 못해 후배 기자들이 고생해서 쓴 기사들이 빛도 보지 못하게 한 점을 반성한다. 그들도 독일 월드컵 호외 제작 때처럼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를 느꼈더라면 좋았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