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수석 아들도 시력장애 아내도 의문사... '서울의 봄' 참군인들의 비극적 삶

입력
2023.12.03 07:00
[영화 '서울의 봄' 참군인 쿠데타 이후 삶]
장태완(이태신) 수경사령관, 3대가 비극
정병주(공수혁) 특전사령관, 야산서 숨져
김오랑(오진호) 소령 아내, 실명 후 의문사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보안사령관)을 필두로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가 1979년 12월 12일 일으킨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지난달 30일 기준 개봉 6일 만에 관객수 271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에는 반란군에 맞서는 정의로운 군인 이태신(정우성) 수도경비사령관과 그를 돕는 공수혁(정만식) 특전사령관과 김준엽(김성균) 육군본부 헌병감이 있고, 죽음을 각오하고 이들을 따랐던 오진호(정해인) 소령과 병사들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12·12 쿠데타 당시 이들의 9시간만 극적으로 다뤄진다. 반란군에 맞섰던 실존 인물들은 쿠데타 이후 신군부가 권력을 잡으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장태완 수경사령관, 부친은 사망·서울대 수석 아들은 의문사

영화 속 이태신의 실존 인물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육군 소장)은 12ㆍ12 쿠데타 이후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1980년 2월 풀려나면서 강제 전역한 장 소장은 이후 6개월 동안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고초를 본 후 충격으로 곡기를 끊었고 198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한 장 소장의 아들 성호(당시 20세)씨는 1982년 1월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행방불명됐다. 한 달 후인 2월 9일 장 소장의 고향인 경북 칠곡 낙동강 기슭 조부 묘소 옆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 소장은 꽁꽁 언 아들을 끌어안고 “나 때문에 이렇게 됐어. 좀 더 따뜻하게 아들을 감싸 안아줘야 했다”며 오열했다.

장 소장은 1993년 펴낸 회고록 ‘12ㆍ12 쿠데타와 나’에서 “미칠 정도로 아들놈 생각이 나면 밤이고 낮이고 때를 가리지 않은 채 묘지로 달려가 대성통곡을 하고 그러다 지쳐버리면 그놈 옆에 누워 밤을 같이 새워본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문 소리만 나면,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아들놈 생전 모습이 선하게 들어왔다. 그럴 때면 아들놈의 공부방으로 건너가 내 안주머니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아들놈 머리털 한 줌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볼에 비벼대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대화를 나누곤 했다"고 절절한 심정을 밝혔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장 소장은 정계에 진출했다. 장 소장은 2002년 3월 "12ㆍ12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해 멸문지화를 입었던 사람으로서 신군부 세력에 의해 박해를 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을 돕고 600만 재향군인들의 권익을 향상하겠다”며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장 소장은 2010년 7월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고 2년 뒤인 2012년 1월엔 그의 아내가 아파트 단지에서 숨진 채 발견돼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숨진 정병주 특전사령관 주머니엔 버스 토큰 다섯 개

영화에서 반란에 가담한 공수여단에 배신감을 느끼며 유일하게 남은 9공수여단의 반란군 진압을 명령했던 공수혁 특전사령관의 실존 인물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육군 소장)이다. 정 소장은 반란군이 특전사령부로 그를 체포하러 올 때까지 저항했다. 당시 반란군의 무차별 총탄에 비서실장 김오랑(영화에서 오진호) 소령의 도움으로 살았다.

정 소장도 쿠데타 이후 전역했고, 방황했다. 그는 특히 자신의 곁을 지켰던 김 소령의 죽음으로 정신적 고통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소장은 1985년 한 인터뷰에서 “내 몸이 성할 때까지는 김 소령의 무덤을 돌보고, 내가 죽고 나서는 자식들이 계속 참배할 생각”이라고도 밝혔다. 그는 서울 근교의 인적이 드문 야산이나 교외를 혼자 산책하며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곤 했다.

12ㆍ12 쿠데타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정 소장은 1988년 10월 행방불명됐고,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 경기 의정부의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생전 군사정권으로부터 취업자리를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곤궁하게 살았던 그는 주로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시신으로 발견됐을 때 그의 주머니엔 버스 토큰 5개가 있었다고 한다.

쓸쓸한 그의 죽음에 당시 장태완 소장은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정 소장은 그에게 “12ㆍ12 진상규명에 조력하겠으며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하자”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묘비에는 비명을 새기지 않았는데, 유족들은 고인의 명예가 회복되고 사인을 밝힌 뒤에야 비명을 새기겠다고 밝혔다.


김오랑 소령 아내는 실명 이후 의문사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중령 추서)은 영화에서처럼 정 사령관을 체포하려던 반란군의 6발의 흉탄에 맞아 숨졌다. 반란군은 그의 시신을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했고, 김 소령의 가족들에게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특전사로 오래 복무한 김 소령은 후방 지역에서 편한 보직을 마다하고 시력을 잃어가는 병을 앓고 있던 아내의 치료를 위해 서울에 남았다. 12·12 쿠데타 발생 9개월 전인 1979년 3월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차출됐다.

김 소령의 아내 백영옥씨는 쿠데타 당시 불안한 마음에 여러 차례 사령부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김 소령과 연결되지 않았다. 백씨는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이 내 전화를 받았을 때 사령관실 내 흩뿌려진 김 소령의 피를 청소하고 있었다고 한다”라며 “자신들의 상관의 피를 닦으며, 그 부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차마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통곡했다.

영화에서처럼 김 소령 부부와 같은 군인 아파트에 살며 선후배 사이였던 박종규 중령의 배신도 컸다. 정 사령관 체포에 앞장섰던 박 중령은 김 소령을 구하지 않았다. 이후 백씨를 만난 박 중령은 "김 소령은 대세의 흐름을 모르고 반항해 그 같은 변을 당한 것"이라고 되레 언성을 높였다. 김 소령은 암매장된 지 3개월 후 동료들의 항의로 1980년 2월 28일 서울국립현충원 제29묘역에 이장됐다. 그는 논란 끝에 1990년 중령으로 추서됐고, 2014년 보국훈장이 추서됐다.

홀로 남은 백씨는 당시 머물던 장교 관사에서 쫓겨났다. 남편의 죽음으로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백씨는 고향 부산에서 전화 상담 봉사를 하며 김 소령 구명 운동을 펼쳤다. 1990년 12월 신군부 세력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행하려다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갑자기 소송을 포기했다. 이후 극도의 신경쇠약 증세를 호소했다. 백씨는 1991년 6월 그가 봉사활동을 하던 건물 아래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백씨가 허리 높이의 난간에서 실족사한 것으로 판단했다. 의문사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밝혀지지 않았다. 백씨의 시신은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됐다. 김오랑 소령의 조카 김영진씨는 지난달 30일 YTN라디오에 출연해 "(백씨가) 다른 질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며칠 후 독일에 가서 눈 수술을 하기로 했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김진기 헌병감은 낙향...무고한 병사들도 희생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납치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대한 체포를 강력히 요청하고, 노재현 국방장관과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등이 모두 육군본부를 버리고 달아날 때 끝까지 남았던 김진기(영화에서 김준엽) 육군 헌병감은 쿠데타 이후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이듬해 강제 전역당했다. 이후 반란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보기 싫다며 낙향했다.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토지공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06년 12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반란군과의 교전에서 숨진 병사들도 있었다. 국방부 헌병대 소속이던 정선엽 병장은 전역을 3개월 앞두고 육군본부 지하 벙커에서 반란군의 공격에 스러졌다. 박윤관 일병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과정에서 발생한 교전에서 희생됐다.


원다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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