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일 서울 강남 한복판 초등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만취한 운전자의 차량에 치여 숨진 동원(당시 9세)군의 아버지 이모씨는 지난달 24일 다시 무너졌다. 이날 열린 항소심에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어린이보호구역치사와 위험운전치사·도주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고모(41)씨는 1심보다 형량이 2년 줄어든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씨는 동원이 사망 1주기(2일)를 앞둔 지난달 30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법원 판결로 피해자는 위로가 아닌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며 "'음주운전 별거 아니네', '공탁 잘 하면 되겠네' 이런 잘못된 선례를 남기지 않도록 엄벌해야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극은 동원이가 매일 오가던 하굣길에서 일어났다. 고씨는 지난해 12월 2일 오후 5시쯤 만취해 차를 몰다가 스쿨존 이면도로에서 동원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사고를 냈다. 이후 차에서 내리지 않고 인근 자택까지 운전한 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아왔다. 사고 당시 고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28%로 면허취소 기준(0.08%)을 한참 웃돌았다.
남은 가족의 일상은 동원이가 세상을 떠난 뒤 완전히 달라졌다. 이씨는 37세에 어렵게 얻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이씨는 "그날따라 아침에 '다녀오세요'라며 더 길게 인사했던 목소리가 생생하다"며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눈을 감을 때면 동원이 모습이 떠올라 쉽게 잠에 들기도 어려운 탓에 불면증이 생겼다. 그는 "사고 이후로 제가 좋아했던, 즐거움을 느끼는 일들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며 "행복이 사라진 것만 같다"고 했다.
집 안에는 동원이가 좋아했던 역사책, 직접 만들었던 미술 작품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1년이 지났지만 부모는 차마 치우지 못했다. 이씨는 "어린 나이에도 세계사, 한국사를 좋아했던 아들과 함께 이야기했던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며 "가끔 동원이가 꿈에 나오는데 소소한 추억 속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고 말했다.
동원이는 호기심이 많고 주변 친구들에게 다정한 아이였다. 유족은 그런 동원이를 기억하기 위해 지난 6월 아들 이름을 딴 '동원장학회'를 만들었다. 장학회는 매달 중·고등학생, 신학생 등 12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해 학업과 생계를 돕고 있다. 이씨는 "동원이가 살아 있었다면 앞으로 했을 법한 일들을 장학생들이 대신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동원이는 어린이 보행 안전에 대한 경각심도 일깨웠다. 오랫동안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았던 사고 현장 학교 주변에는 하루아침에 보도와 방호 울타리가 생겼다. 양방향 차량으로 혼잡했던 주변 도로도 일방통행 구역으로 일사천리 지정됐다. △스쿨존 내 보도 설치 의무화 △방호 울타리 우선 설치 △교차로 무인 교통단속용 장비 설치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하는 '동원이법'(도로교통법 개정안)도 올해 1월 발의됐다.
안타까운 사고에도 사회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스쿨존 사망사고는 여전히 잇따르고 있고, 음주운전 사망사고에 대한 법적 처벌은 관대하다. 지난 4월 8일 대전 서구의 한 스쿨존에서는 배승아(9)양이, 5월 10일 경기 수원 권선구 스쿨존에서는 조은결(8)군이 동원이처럼 무고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스쿨존 음주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 걸 보면 동원이가 떠나도 바뀐 게 없구나 싶어서 힘들다"며 "부모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고 한숨을 토했다.
스쿨존 사고에 대한 낮은 형량은 사고를 막기에 부족하다. 동원이를 차로 치어 숨지게 한 고씨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징역 5년으로 감형됐다. 1심과 2심 모두 사고를 내고 집으로 돌아간 고씨에게 도주치사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고씨가 현장에 다시 돌아와 자신이 가해자임을 밝히고 음주 측정에 협조하고, 순순히 체포에 동의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씨는 "분명히 동원이를 친 사실을 알고도 멈추지 않고 집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며 엄격한 법의 적용을 촉구했다.
어린이보호구역치사와 위험운전치사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1심에서는 징역 7년이 선고됐다. 하지만 2심에서는 이중처벌을 피한다며 둘 중 더 무거운 죄의 형량만 따져 2년을 감형해줬다. 또 고씨가 혈액암을 앓고 있고, 5억 원대 공탁금을 냈다는 점도 제한적이나마 고려됐다.
하지만 이씨는 "동원이의 희생으로 과연 세상을 바꾸고 있는지 매일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데 바뀐 게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면서 "마치 법원이 저희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고 가해자의 고통만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원하지 않는 공탁이 법원 판단에 반영된 것도 참담하기만 하다. 그는 "공탁 제도는 피해자 구제를 위한 게 아니냐. 반드시 피해자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며 "저는 아직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했는데 왜 재판부가 대신 용서하냐"고 분노했다.
이씨는 엄격한 법의 적용을 촉구했다. 사건은 검찰의 상고로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을 받게 된다. 이씨는 "우리 동원이를 끝으로 더 이상 또 다른 어린이가 스쿨존에서 사망하는 사고는 없어야 한다"며 "음주운전은 피해자는 물론이고 자신의 가정, 인생까지 파괴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생겨야 세상이 바뀐다"고 강조했다. 또 "합당한 판결만이 피해자를 위하고 구제하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동원이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 2일, 아이에게 가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묵직한 그의 음성에서 결기가 느껴졌다. "언젠가 동원이를 다시 만날 때까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아요. 힘들겠지만 버텨야죠. 하늘나라에 있는 동원이가 제게 자주 찾아와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