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의 위기'라는 다섯 글자가 살갗으로 느껴진 한 해였다. 본격적인 경기 침체에 들어서면서 시장은 얼어붙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출판사들의 영업이익은 38.7% 감소했고 2020년 이래로 '아동'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발행 종수와 부수가 줄었다. 설상가상 정부는 세종도서 폐지 추진,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 예산 전액 삭감 등 '책 문화 때리기'에 골몰했다. 출판업계에서는 "매년 위기라지만 올해는 역대급"이라는 비관론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출판은 위축되지 않았다. 당대의 현실을 날카롭게 감각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질문을 던지며, 개인의 정신을 고양하는 책이 올해도 꾸준히 탄생했다. 지난달 25일 제64회 한국출판문화상 예심 심사를 위해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 모인 심사위원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중요한 의제를 제시하려는 출판계의 분투가 엿보였다"고 입을 모았다.
예리한 문제의식을 벼린 사회비평서가 단연 주목을 받았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늙어가는 이들을 탐구한 논픽션 '에이징 솔로'와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의 왜곡된 능력주의를 꼬집는 '공정감각', 성폭력 가해자들을 위한 법률 시장의 성장을 폭로한 '시장으로 간 성폭력' 등은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호평받았다. 최근 청소년 사이에서 섭식장애와 다이어트 강박이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보디 포지티브(자기 몸 긍정주의)'를 주제로 한 청소년 에세이 '친애하는 나의 몸에게'도 좋은 점수가 매겨졌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고유명사처럼 돼버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기 '장애시민 불복종'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에 묵직한 울림을 준다. 다만 지난해에 이어 과감한 시도로 출판을 끌고 가는 편집과 기획의 힘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는 얘기가 나왔다.
'다양성'과 '넓어진 저변'도 눈여겨볼 만한 열쇳말이다. 특히 번역 부문에서는 영어, 일본어뿐 아니라 노르웨이 소수언어와 희랍어, 페르시아어로 쓰인 작품까지 두루 주목을 받았다. 주제와 장르도 인문사회에서부터 자연과학, 문학, 그리고 고전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번역서가 예심의 관문을 통과했다. 통상 그림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어린이ㆍ청소년 부문은 이례적으로 문학 부문이 강세를 보였다는 평이다.
올해도 저술(학술, 교양), 어린이ㆍ청소년, 번역, 편집 부문에서 예심을 통과한 책은 분야별로 10종씩, 모두 50종이다. 최종 응모작이 1,117건임을 고려했을 때 본심 진출만도 대단한 성취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출판계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올해부터 예심을 통과한 후보작을 분야별로 '올해의 학술서' '올해의 교양서' '올해의 어린이ㆍ청소년 책' '올해의 번역서' '올해의 편집'이라 호명한다. 이달 중순 본심을 거쳐 분야별 최종 수상작 1종이 30일 본보 지면을 통해 발표될 예정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책의 길'을 묻고 또 물었다. 유튜브 등 여러 매체가 개인의 시간을 잠식하고,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 세태가 만연한 때일수록 '책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본질적 질문에 천착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김수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 백승종 역사가, 윤경희 문학평론가, 조영학 번역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등 학계와 출판계를 두루 아울러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치열한 토론 끝에 선정한 '올해의 책'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