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 중독, 여성 편력… 우상 안희정은 이렇게 몰락했다”

입력
2023.11.23 14:40
23면
‘안희정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 첫 조력자 문상철, ‘몰락의 시간’ 출간
7년간 안희정 핵심참모로 지켜본 몰락 과정
지사 수행비서 거쳐 대선후보 수행팀장 맡아
“안희정 사건, 구조적 문제 정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른 안희정을 마주하게 될 것”

“6개월간 약 20곳에 지원했지만 대부분 최종에서 떨어졌다. 이게 딱 나의 위치값이었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를 도운 조력자에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지은 전 충남지사 수행비서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준 동료 문상철(40) 전 충남지사 비서관이 그 시간을 기록한 책 ‘몰락의 시간’(메디치)을 22일 출간했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 피해자를 도운 조력자의 서사가 공개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피해자를 도왔으니 원래 김지은씨와 더 친밀한 관계였거니 여기겠지만, 그 반대다. 2011년 도지사 비서실 메시지와 여론조사 담당 비서관으로 충남도청에 들어간 게 시작이다. 도정 집무 기록을 담당하게 되면서 안 전 지사의 신임을 받아 ‘안희정의 공부’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안 전 지사의 식견을 넓혀줄 인사들을 모아 국가 경영을 배우게 하는 장기 대선 전략이었다. 2016년 안 전 지사가 출간한 저서 ‘콜라보네이션-시민X안희정 경험한 적 없는 나라’도 그가 밑그림을 그렸다.

이어 안 전 지사의 심기와 기호, 생각까지 꿰고 있어야 맡을 수 있는 수행비서, 5명으로 시작한 대선 후보 경선 준비 ‘코어팀’, 201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후보 수행팀장에 이르기까지 7년간 안 전 지사의 지근거리에서 일했다.

음해성 지라시,협박, 해고 압력 시달려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정치판을 떠났다. 어렵게 ‘미투’한 피해자의 첫 조력자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배척당했다.

문 전 비서관은 정세균 국회의장실에서 일하던 2018년 2월 25일 김지은씨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평창올림픽 폐막식이 열리던 날이었다. 울먹이던 김씨는 “선배, 저 지사님께 성폭행을 당했어요. 도와주세요”라고 호소했다.

그 순간부터였다. 문 전 비서관의 정치 인생이 뒤바뀌었다. “안희정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지난 7년여의 여정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라고 그는 책에 썼다.

피해자와 조력자가 싸워야 했던 상대는 가해자 1인이 아닌, 안희정이라는 권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정치집단이었다. 문 전 비서관에 따르면, 안 전 지사는 평소 “노무현 가문의 가풍에는 그런 일이 없다” “안희정 집안을 일궈야 한다” 등 ‘가문’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측근들도 어느새 스스로를 ‘안희정 가문’이라고 불렀고 호칭도 형, 동생이었다. 문 전 비서관은 “안희정이라는 아버지를 필두로 구성된 가족 공동체 같았다”고 돌이켰다.

“안 지사의 정치 인생이 끝나면서 네 인생도 함께 끝났어.” “네가 모시는 분께 누 끼치지 말고 그년 그만 도와줘.”

그가 김지은씨를 도우면서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일터에서도 그만둬야 했다. 그는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 후보 캠프에 발을 디뎠지만 결국 밀려났고, 다른 의원실 근무 길도 막혔다. 안희정계 의원들이 그를 지목해 “아주 영악한 애” “그 사람을 잘라야 해가 없다”며 해고를 종용하는 대화를 우연히 듣기도 했다.

‘음모성 지라시(정보지)’ 유통, 가족까지 거론하는 협박도 그가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는 “미투 이후 내가 겪는 세상은 그 이전에 알던 세상과 달랐다. 실제의 세상은 턱없이 불공정했고 기울어져 있었다”고 털어놨다. 현재 그는 경기도에 있는 한 중견기업에 다니고 있다.

애초 그는 가해자의 최측근이었다

문 전 비서관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핵심 참모였다. 그랬기에 ‘안희정’이라는 정치적 우상이 추락해가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기도 하다. 책의 전반부엔 ‘노무현의 뜻을 계승할 미래 주자’였던 안 전 지사가 어떻게 권력에 취하고 그 카르텔에 잠식돼가는지 적나라하게 기술돼 있다.

2010년 첫 임기를 시작했던 안 전 지사는 도정 초기엔 참여정부의 ‘이지원 시스템’을 본떠 보고와 결재 대부분을 온라인으로 대체해 도정 시스템을 혁신했고, ‘좋은 정치엔 공부가 필요하다’며 측근들에게도 “앞으로는 나와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나의 진짜 동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랬던 안 전 지사는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들을 먼저 청해 귀담아 듣던 초기와는 달리 점차 반대 의견에 불편함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더 철옹성 같은 의전을 원했다”고 문 전 비서관은 술회했다. 심지어 간단한 예방접종도 도청 산하 공공의료원 간호사들을 집무실로 불러 맞았다.

외모 집착, 여성 편력... 안희정의 추락

그러니 수행비서의 일은 끝없이 늘어났다. 퇴근 때엔 지사가 몇 분 후에 도착하는지 공관의 경비 근무자에게 사전에 연락했고, 공관 근무자는 대문을 열어놓은 채 앞에서 정자세로 경례 자세를 취하며 지사를 ‘영접’해야 했다.

외모를 가꾸는 데도 큰 시간을 할애했다. “(도지사) 재선 이후 스스로 다른 정치인들과 외모로 승부하겠다는 생각으로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몸에 딱 붙는 슈트핏을 유지하려고 안경닦이조차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책에는 안 전 지사의 ‘여성 편력’도 등장한다. 문 전 비서관은 “오래전부터 수행비서들은 인수인계를 주고받을 때 항상 지사의 여성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안 지사의 여성 관계에 대해선 봐도 못 본 것이고,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무조건 지켜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정 중에도 여성과 관련된 비공개 일정들이 많았다”고 책에 썼다.

안 전 지사의 여성 문제는 김지은씨의 책 ‘김지은입니다’에도 나온다. 평소 연락하던 여성과 어울리는 술자리를 지켜야 했던 일화나, 측근들이 모임이 있을 때 안 전 지사의 옆자리에 여성들을 앉게 했던 일화 등이다. 안 전 지사의 수행비서로 일했던 또 다른 인사 역시 본보 통화에서 “문서로 남는 인수인계 매뉴얼엔 없지만, 구두로 여성 문제와 관련해 조심해야 할 내용을 전달했다”며 “수행비서로 일할 때도 안 전 지사가 여성과 만나는 시간에 오해를 사거나 눈에 띄지 않도록 막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고 말했다.

빡빡한 대선후보 경선 일정 중 유명 여성 배우를 보려고 늦은 시간에 차를 돌리는 일도 있었다. 애초 “이 시간에 무슨 사진 촬영이냐. (약속을) 취소할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해보라”던 안 전 지사는 사진작가에게서 “마침 배우 A씨가 촬영차 와 있다”는 얘기를 듣고선 되레 운전기사에게 “속도를 내라”며 스튜디오로 향했다는 것이다. “안 전 지사는 유독 배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대화를 했다.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하는 순간이 반복됐다. 곁에서 보는 마음이 점점 더 불안해질 정도였다.” 결국 배우는 불쾌함이 드러난 얼굴로 서둘러 스튜디오를 떠났다.

여성 기자들과의 저녁 자리를 유독 선호했다는 주장도 책에 담겼다. 한 여성 기자와 저녁 식사를 하려고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고, 문 전 비서관까지 자리를 뜨도록 한 뒤 차량 옆자리에 기자를 태운 일도 거론됐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문 전 비서관은 그때 처음으로 ‘내가 지금 맞는 사람을 지지하고 있는 건가’ 회의가 들었다고 돌이켰다.

안희정의 차남, 진실 규명 도왔다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책에 담겼다. 안 전 지사의 장남과 달리 둘째 아들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추가 피해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고 그 녹음 파일을 문 전 비서관에게도 공유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에도 그 자료를 전달했으나 검찰은 “가족이기에 받기 곤란하다”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추가 피해자 중에는 문 전 비서관에게 “지사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니까 너무 믿지 말라”고 경고했던 여성 선배뿐만 아니라 몇 명이 더 있었다고 문 전 비서관은 책에 적었다. 안 전 지사의 성폭력 혐의에 확신을 갖게 된 계기다.

누구보다 안희정이라는 정치인과 그를 둘러싼 공고한 권력 집단의 속성을 잘 아는 그라서 피해자 김지은씨의 도움 요청에 더 망설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김씨의 손을 잡은 이유는 이것이다. “나 역시 이 범죄를 용인한 무수히 많은 공범 중 하나다.”

가장 가까운 참모인데도 범죄가 일어나는지조차 알아채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범죄가 용인될 만한 권력의 성을 쌓는 데 일조했다는 자책 때문이다.

여론조사 연구원이었던 그가 정치판에 들어온 이유는 정치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도구라고 믿어서다. 그랬던 그는 ‘안희정 사건’을 겪으면서 안희정이라는 정치가, 자신이 믿었던 미래가 몰락하는 과정을 목도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고 믿기에 이 책을 썼다. “가해자 한 명의 잘못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구조적인 문제를 제대로 정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제2, 제3의 안희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우상의 탄생을 촉진하고 피해자를 공격한 수많은 정치인이 안희정이 사라진 이후 이미 새로운 숙주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책에는 또 현재도 논란의 불씨로 작용하는 ‘팬덤 정치’의 폐해, 사이비 언론인들의 ‘방송 장사’, 해외 방문 때마다 접근해오는 외국 로비스트, 선거판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역술인들까지 찾게 된 과정 등도 나온다. 문 전 비서관은 책에서 “정치인 스스로도 신격화를 용인했고 주변의 지지자들 또한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나갔다”고 지적했다.

김지은 ”멈춰진 그의 시간이 이어지길”

문 전 비서관은 6개월간 집필에 매달렸다. 그는 23일 “외면하고 회피해왔지만, 내가 겪은 일들은 결국 사유재가 아니라 공공재라는 생각에 기록으로 남기는 게 의미가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애초 문 전 비서관은 출판사 네다섯 군데에 출간 의사를 타진했지만 모두 “감당하기 부담스러운 내용”이라며 거절했다. 메디치는 “미투는 정치인 안희정의 몰락을 가속화한 결정적 사건이었을 뿐 오래전부터 예견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며 “한국 정치의 폐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판단해 출간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김지은씨는 추천사에서 ”정치적 동지였던 안희정과 문상철은 오랜 시간 같은 곳을 바라봤지만, 미투 이후 다른 곳을 본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정치인의 꿈이 어떻게 현실의 비뚤어진 구조와 만나 변형되는지 그 실상을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몰락의 시간’ 속에서 오히려 나는 작은 희망을 보았다. 멈춰진 그의 시간이, 지워진 그의 기록이 이어지길 소망한다”고 썼다.

인세 전액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기부해 성폭력 피해자의 회복에 쓸 예정이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독자들을 반겼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정치를 도구로 선택한 당신께 이 책을 바칩니다.”

이 같은 내용의 책이 출간된 것을 두고 안 전 지사의 생각을 들으려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와 가까운 인사들은 “안 전 지사가 휴대폰 번호도 바꾸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한 측근은 책의 주요 내용 관련 질문에 “책 내용을 보고 판단할 일”이라고 말했다.

김지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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