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교문 나선 마지막 수험생... 399명의 '조금 특별했던' 수능 도전기

입력
2023.11.18 04:30
장애 등 '편의제공대상자'도 수능 치러
정보부족·고된 시험에 학부모들 하소연
"뿌듯하다" "대견해"... 시험 후 홀가분

16일 오후 10시 서울 종로구 서울맹학교 교문 앞. 적막감만 감도는 컴컴한 교정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덩치 큰 남학생이 작은 체구의 중년 여성에게 한쪽 팔을 맡긴 채였다. 이들은 2024학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셔터를 내린' 마지막 수험생 채모(19)군과 어머니다.

다른 수험생들이 해방감을 만끽할 야심한 시간에 모자가 고사장을 빠져나온 이유는 뭘까. 채군은 중증 시각장애인이다. 이날 마지막 시험인 5교시(제2외국어·한문영역)를 오후 9시 48분에서야 끝냈다. 오전 8시에 입실해 14시간 가까이 시험장을 지키느라 그의 낯빛에선 고단함이 짙게 배어났다.

"아들, 너무너무 고생했어."

엄마는 그런 아들을 대견함 반, 안쓰러움 반의 마음을 담아 꽉 껴안았다.

다르지만 배려 가득한 399명의 시험

올해도 '조금 특별한(?) 수능'을 치른 399명이 있다. 100쪽 넘는 점자 문제지를 손가락 끝으로 읽어야 하고,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남들보다 문제풀이 시간이 2, 3배는 족히 걸리기도 한다. '시험편의제공대상자', 장애 수험생들의 이야기다.

이들에겐 시·청각, 뇌병변 장애 등 시험 응시에 불편이 커 시험시간 연장이나 별도 문제지 제공 등의 편의가 주어진다. 장애, 질병 등으로 똑같은 환경에서 시험을 볼 수는 없지만 최대한 '공정한' 기회를 주자는 취지다.

가령 시각장애 수험생의 경우 장애 정도에 따라 1.5~1.7배 긴 시험시간을 보장받고, 점자 및 확대·축소 문제지, 음성평가 자료 등을 제공받는다. 뇌병변 등 운동장애 수험생은 1.5배 시간을 더 쓸 수 있다. 청각장애 수험생은 시험시간은 동일하되, 듣기평가를 지필검사로 대체(중증)하거나 보청기 사용(경증)이 가능하다.

전용 시험장도 따로 있다. 서울지역엔 서울맹학교(6명)와 서울농학교(38명), 서울경운학교(20명), 여의도중(23명) 등 4곳이 편의제공대상 수험생 전용 시험장으로 지정됐다. 예비소집일엔 수화를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배치되고, 수능 당일에는 교문에서 5초마다 알림음을 울려 교문 위치를 알려준다. 수험생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한 것이다.

청각장애인 딸을 둔 윤모(55)씨는 "예비소집일에 선생님들이 수화를 할지 묻고, 입모양도 크게 해주셔서 고마웠다"고 했다. 중증 청각장애 수험생 박채성(25)씨도 "수능을 처음 봐 걱정했는데 안내방송 수어통역이 있어 마음이 놓였다"고 말했다.

14시간 시험, 100쪽 시험지... 응시 자체가 도전

주변에서 아무리 도와준다 한들 장애를 갖고 수능을 치르는 자체가 큰 도전이다. 시험시간이 길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데다, 저녁 먹을 시간도 부여되지 않아 주린 배를 붙들고 끝까지 문제를 풀어야 한다. 중증 시각장애 수험생을 둔 한 아버지는 "국어 점자 시험지는 100쪽이나 되고, 수학 그래프도 점자로 읽기 어렵다"고 걱정했다. 학부모 김모(53)씨 역시 "아이가 13시간째 의자에 앉아 있어 몸살이 날 것 같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험 접수와 편의제공 신청 절차가 쉬운 것도 아니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2급 청각장애 수험생 학부모 A(49)씨는 "학교에서 수능 접수가 안 돼 종로구 소재 교육청을 방문하느라 연차를 썼다"고 말했다. 뇌병변 장애를 지닌 딸을 둔 김은영(46)씨는 "시험 편의제공 신청 등 특수학생 지원은 부모가 모두 발품을 팔아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그래도 부모의 노력이 자녀의 사투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날 아침 종로구 서울농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딸을 배웅한 학부모 문모(52)씨는 "아무래도 불편한 부분(1급 청각장애)이 있어 떨리고 걱정된다"며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딸이 시험 시작 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기 위해 겉옷도 없이 뛰어나와 "엄마, 안아줘"라고 하자 문씨의 눈가는 금세 붉어졌다.

"고단한 인생 길, 문턱 하나를 넘다"

고생 끝엔 행복이 오는 법이다. 길고도 특별했던 수능을 무사히 마친 학생과 학부모들은 너도나도 뿌듯함과 자신감을 내비쳤다. 중증 청각장애가 있는 정승연(18)양은 "인생의 문턱 하나를 넘은 것 같다"며 웃었다.

뇌병변 장애가 있는 정모(18)양은 문 앞에서 기다리는 어머니를 발견하자 눈물부터 터뜨렸다. 뇌종양으로 고된 항암치료를 견뎠고, 한때 생사를 넘나들던 정양은 "나보다 휠체어 탄 친구들이 더 힘들었을 것"이라며 외려 다른 수험생들을 걱정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던 어머니 김모(46)씨의 얼굴에도 밝은 미소가 피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워. 잘했어, 고생했어. 우리 아기~"



김나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