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은 경제는 물론이고 외교·안보·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의 핵심 동반자다. ‘새의 양 날개’처럼 서로를 꼭 필요로 하고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아세안 외교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이장근(58) 주아세안 대한민국대표부 대사는 8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내년에 수교 35주년을 맞는 한국과 아세안의 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과 아세안은 1989년 ‘부분 대화 관계’를 맺으며 처음 손을 맞잡았다. 이후 ‘완전 대화 관계’(1991년), ‘포괄적 협력 관계’(2004년), ‘전략적 협력 관계’(2010년)를 거치며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내년에는 최고 수준의 외교 관계인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의 격상을 추진하고 있다. 35년 만에 국제사회에서 명실상부한 최고 파트너가 되는 셈이다.
이 대사는 “또 다른 35년을 향해 함께 나아가려면 기후변화, 인공지능(AI), 에너지 안보 등 미래분야 협력도 필수”라며 새로운 차원의 협력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아세안 대표부는 한국과 아세안 관련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2012년 한국 정부가 해외에 개설한 재외공관이다. 아세안을 중심으로 한 다자 외교를 펼친다. 올해 5월 부임한 이 대사는 현장에서 느낀 아세안의 가능성과 영향력을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아세안의 중요성은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 아세안은 ‘젊은 시장’이다. 10개 회원국 인구는 약 6억6,000만 명이고, 인구의 절반은 30세 이하다. 연평균 5%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며 향후 10년 내 중산층이 2배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아세안 협력 초점은 경제 분야에 맞춰졌다. 이 대사는 “아세안은 중국 다음으로 제일 큰 한국의 교역 상대”라며 “1989년 82억 달러(약 10조6,000억 원)에 불과하던 교역액은 지난해 2,075억 달러(약 271조 원)로 26배 뛰었고, 같은 기간 전체 교역에서 동남아시아 10개국이 차지하는 비율도 6.5%에서 15%로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몇 해 전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치열해지고, 글로벌 공급망이 불안해지면서 태평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아세안 몸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매년 열리는 아세안 관련 정상·고위급 회의에는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북한, 유엔, 유럽연합(EU) 고위급 인사가 앞다퉈 참석한다. 아세안을 우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한국 역시 외교 안보 측면에서 아세안과 적극 손을 잡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한-아세안 연대구상(KASI·Korean-ASEAN Solidarity Initiative)’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인도태평양 틀 속에서 아세안에 특화된 협력 방안을 추진하기 위해 만든 전략으로, 방산과 사이버안보 등 분야에서 포괄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대사는 “과거 정부와 대비되는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아세안 전략 특징은 안보 협력 강화”라며 “아세안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아세안+3(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등 여러 다자 지역협력기구를 주도하고 강대국을 상대하기 때문에 이들과의 정치·안보 공조가 경제 협력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아세안은 한반도 문제와도 뗄 수 없다. 북한은 말레이시아를 제외한 아세안 9개 국가와 수교했다. ARF는 북한이 유일하게 참여하는 역내 다자안보 협의체이고, 아세안이 주도하는 대부분의 회의에선 북핵 문제가 핵심 의제로 다뤄진다. 이 대사는 “올해 북한 위성 발사 잔해는 필리핀 앞바다에 떨어졌고, 싱가포르 등은 북한의 암호화폐(가상자산) 탈취로 피해를 봤다. 아세안 입장에서 한반도 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아세안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협력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이 대사는 한국과 아세안을 ‘앞으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아세안 외교관을 만날 때 많이 듣는 이야기가 '한국은 아세안과 과거사나 영토 문제 등으로 얽혀 있지 않아 다른 대화 상대국과 비교해 매우 편하다’는 것”이라며 “동남아 지역을 둘러싸고 강대국 간 갈등이 첨예해지는 상황에서 한국은 호혜와 협력의 파트너로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세기 전부터 공적개발원조(ODA)를 앞세워 아세안을 공략한 일본, 화교 인프라를 활용해 영향력을 펼치는 중국과 달리 한국이 아세안 외교 정책에 있어 후발주자임에도 끈끈한 협력 관계를 맺을 수 있던 이유다. 아세안의 11개 대화 상대국 중 특별정상회의를 3번이나 개최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게다가 식민과 전쟁의 역사를 경험하고 저개발국에서 출발해 산업화·민주화를 모두 달성한 한국은 아세안에 ‘우리도 하면 된다’는 롤모델이 됐다.
한류를 비롯한 소프트파워는 한국과 아세안을 더욱 가깝게 만드는 ‘접착제’다. “이제 아세안에선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를 즐기고, 한국어로 인사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코리아(KOREA·한국)’는 신뢰를 상징하는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고 이 대사는 말했다.
이 대사는 한국과 아세안이 공존하는 미래에 힘을 실었다. 그는 “한국은 빠른 발전을 이뤘지만 저출생·고령화와 경제성장 둔화 과제를 안고 있고, 아세안은 젊은 노동 인구와 풍부한 자원을 지녔지만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경험과 기술이 축적되지 않았다”며 “양측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