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스포츠(국가대표급)는 한국, 생활 스포츠는 일본이 강하다’는 말이 통용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 상식이 깨졌다. 현시점에서 일본은 엘리트 스포츠도 우리보다 세다. 야구와 축구, 농구∙배구(남녀) 등 4대 스포츠 모두 일본이 한국보다 세계 랭킹이 높다. 특히, 10년 전만 해도 한 수 아래로 봤던 남녀 농구에서조차 밀린다. 일본은 육상 단거리 등 아시아 선수에게는 '벽'처럼 느껴졌던 종목에서도 올림픽 메달을 따내는 등 저력을 보이고 있다.
생활 스포츠 강국 일본은 어떻게 엘리트 스포츠도 강국이 됐을까.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책임진 일본 체육계 리더들에게 비결을 직접 물어봤다. 이들은 △전임자가 세운 계획을 쉽게 뒤엎지 않는 문화 △약점을 ‘현미경 분석’해 보완해주는 핀셋 지원 △성인 대표팀 전략을 유소년팀에도 이식하는 협력 시스템 △국가대표 선수들의 마음 자세 등을 꼽았다. 이런 내용은 위기의 K(한국)스포츠에 주는 힌트이기도 하다.
일본 국가대표들의 경기력 향상을 총괄하는 가사하라 겐지 일본올림픽위원회(JOC) 강화부장은 지난달 17일 일본 도쿄의 JOC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자신 있게 말했다. “일본은 왜 초장기 목표를 세우느냐”는 물음에 내놓은 답이었다. 본보 질문에는 ‘위원회나 협회 지도부가 바뀌면 어차피 깨질 계획을 보여주기식으로 내놓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깔렸다. 일본 축구의 ‘100년 구상’이나 JOC의 ‘비전 2064’ 등이 대표적이다. 가사하라 부장은 그러나 단호했다. “일본은 정말 지킬 마음으로 100년 단위 계획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 축구가 단단해진 역사를 보면 허튼 말이 아니다. 일본축구협회(JFA)는 1993년 J리그 출범 당시 ‘100년 내 세계를 제패할 전력을 만들겠다’며 100년 구상을 내놨다. 2005년에는 ‘2050년에 일본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고 우승하겠다’는 ‘‘재팬스 웨이’(Japan's way∙일본의 길) 비전도 발표했다. 5년 또는 15년 단위의 세부 계획도 준비된다. 당장의 성적 대신 먼 미래를 바라보기에 근본적 해결책을 마련해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은 차근차근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 J리그 연수 경험이 있는 박공원 전 대한축구협회 이사는 “JFA는 장기 계획에 따라 어린 선수가 조금만 가능성을 보여도 해외로 보낸다"면서 "일본 국가대표팀 주전을 보면 거의 해외파인데 이들을 효과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독일에 클럽하우스를 만들려고 한다"고 전했다.
성과도 뚜렷하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에서 세계 최강 독일과 스페인을 격파하고 ‘죽음의 조’에서 살아남았다. 다지마 코조 JFA 회장은 16강 진출에 성공한 뒤 “JFA 회장이 바뀌더라도 재팬스 웨이는 똑바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초장기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건 ‘쓰나구’(つなぐ∙’연결한다’는 의미) 문화 덕이라고 말한다. 가사하라 부장은 “일본인들은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성과가 나온다'는 생각으로 계획을 이어가는 걸 소중히 생각한다”며 “시대가 바뀌면 세부 계획은 조금 달라질 수 있지만 함께 고민해 세운 비전 자체는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100주년이 되는 2064년까지 스포츠를 통해 개인의 성장과 국가의 발전, 세계 평화에 공헌하겠다는 계획을 담은 '비전 2064'도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만들어졌다.
한민 문화심리학자는 "일본 사회는 '모든 사람이 정해진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 당장 돈이 안 돼도 계속 투자한다"면서 "노벨상 수상자 20여 명을 배출한 것도 투자와 연구가 150년 가까이 축적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일본 중소기업의 연구직 직원이 종종 노벨상을 받는 이유도 당장 성과가 없어도 연구를 포기시키지 않는 쓰나구 문화 덕이라는 평가다.
일본 특유의 세밀함도 스포츠 강국이 된 비결이다. 특히, 최근 10년간 비약적으로 성장한 농구가 '현미경 분석'의 덕을 톡톡히 봤다. 일본은 원래 '교과서 같은 농구를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틀에 박힌 플레이 탓에 예측이 쉽다는 혹평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라졌다. 한국 등 맞상대들은 "일본 선수들이 창의적으로 움직여 막아내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히가시노 도모야 일본농구협회(JBA) 경기위원장은 “2016년 JBA에 테크니컬 하우스(기술발전부)를 만들면서 경기력이 높아졌다"고 했다. 테크니컬 하우스는 농구 월드컵과 올림픽, 아시아에서 열리는 모든 대회가 끝날 때마다 일본팀의 경기 내용을 평가하고, 강·약점을 분석해 기술 보고서를 만든다. 손대범 KBSN 스포츠 농구 해설위원은 “JBA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는데 매우 구체적으로 보완할 점을 적어 놔 놀랐다"고 했다.
실제 일본 여자 농구 대표팀은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당시 8강에 진출했지만 공격 리바운드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히가시노 위원장은 “리바운드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위치 선정법 등을 제시했고 이를 익히기 위한 훈련 방법과 시합 때 신경 써야 할 점, 리바운드 상황에서 염두에 둬야 할 사고방식까지 보고서에 적었다"고 말했다. 노력은 통했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대표팀의 공격 리바운드가 크게 향상돼 은메달을 따냈다.
세계 제패를 목표로 하기에 일본에는 현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다. 일본 체육계는 이를 위해 각 지역 유소년팀 코치와 선수들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제시한다. 히가시노 위원장은 “올림픽과 농구 월드컵 기술보고서는 JBA 지도자 자격증 소지자라면 누구나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각 유소년팀은 개성을 갖추려는 노력도 하지만, 일본에 가장 어울리는 전략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안도 카오리(46) 오사카 군에이여학원고 농구부 감독은 “일본여자농구리그(WJBL) 등의 연수를 받을 때 ‘키가 크지 않은 일본 농구가 세계 강팀을 이기려면 스피드와 득점 효율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고 말했다. 실제 유소년 지도자들은 이런 조언을 훈련 때 적용한다.
축구 등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다. JFA는 47개 도도현부(우리의 광역시도 개념)에 담당 인스트럭터를 배치하고, 이들을 통해 지역 코치들에게 전술별 훈련 방식 등을 전달한다.
어린 선수들이 ‘최고가 되고 싶다’는 마음 자세를 갖도록 동기부여도 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도쿄 올림픽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홍성찬(47) 쓰쿠바대 체육과 교수는 “일본에선 종목별 유망주를 방학 때 모아 도쿄의 내셔널트레이닝센터(NTC·국립 선수촌)에서 합숙훈련을 받게 한다”면서 “성인 스타급 선수들도 일부러 같은 장소에서 훈련받도록 하는데 동경해온 선수가 바로 옆에서 훈련하는 걸 보면 자극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
학생 선수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하는 데도 신경 쓴다. 구키도메 다케시 일본국립스포츠과학센터(JISS) 소장은 “6개 종목의 최정예 유소년 선수 30명이 NTC에서 자주 훈련을 하는데, 이들이 인근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한다”면서 “국립시설에서 훈련하면서 공부도 병행할 수 있어 대학도 잘 진학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JOC의 경기력 강화본부 슬로건이 '인간력(인성과 매력) 없이는 경기력 향상도 없다'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일본 스포츠의 전성기가 짧게 끝나지 않으려면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훌륭한 존재로 비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가사하라 부장은 "어린이들이 운동 선수들을 보고 '나도 스포츠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한다. 동경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운동 선수들이 2010년대 들어 스포츠를 통해 어떻게 사회 공헌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한 점도 국제대회 경기력이 높아진 이유로 꼽힌다. 한일 스포츠를 취재해온 오시마 히로시(62) 작가는 "일본 선수들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비극을 마주하며 '내가 스포츠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스포츠를 통해 국민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는 게 사명이라고 생각하게 된 선수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다. 오시마 작가는 "한국 외환위기 당시 야구의 박찬호와 골프의 박세리가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줬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동일본의 이와테현 출신인 '야구 스타' 오타니 쇼헤이(29·LA 에인절스)는 "대지진 전까지는 나를 위해 야구를 했다면 재난 이후에는 사회에 공헌할 방법도 생각하며 운동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