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근로시간 전면 개편 철회… 건설·제조업 유연화 '노사정 합의' 추진

입력
2023.11.13 19:30
1면
사업주 85% ‘현 제도 괜찮다’
주 52시간제 '유지' 방침 
"일부 업종은 개선 필요" 
건설, 제조업 60시간 추진할 듯

윤석열 정부가 이른바 ‘주 69시간 노동’ 논란을 빚은 근로시간 개편안 원안을 추진하는 대신 특정 업종·직종을 선별해 근로시간 개편을 추진하기로 했다. 대국민 설문조사 결과 현행 주 52시간 근로제(법정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상당하고 특히 사업주 불만이 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자 '핀셋 개편'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민적 저항이 큰 근로시간 개편을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구체적 개편 방안 및 일정은 노사정 대화를 통해 논의하겠다며 한국노동조합총연맹에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복귀를 요청했고, 한국노총은 즉각 응했다. 지난 6월 당국의 조합원 탄압을 이유로 경사노위에 불참한 지 5개월 만이다. 단절됐던 노사정 대화가 가동되면서 근로시간 유연화를 포함한 정부 노동 정책이 일부 진전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사업주 85% '현 제도에서 문제없다'

고용노동부는 13일 국민ㆍ근로자ㆍ사업주(기업인) 총 6,030명을 대상으로 한 ‘근로시간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에 따르면 ‘연장근로 확대’에 동의한 의견은 국민 46.4%, 근로자 41.4%, 사업주 38.2%로 나타났다. 국민 10명 중 4명가량이 근로시간 개편에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근로시간 규정에 불만이 큰 것도 아니었다. 사업주 가운데 ‘현행 주 52시간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14.5%에 그쳤고, 나머지 85.5%는 ‘애로사항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현행 근로시간 제도에서는 갑작스러운 업무량 증가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항목에 ‘그렇다’고 답한 사업주도 33%에 불과했다.

정부는 현행 주 52시간제가 ‘기업 혁신과 개인 행복추구에 방해가 된다’며 개편을 밀어붙여왔다. 경영계도 ‘현행 제도가 지나치게 경직돼 기업 활동이 어렵다’며 이를 지지했다. 지난 3월 고용부는 연장근무 허용시간 총량은 유지하되 현행 주 단위인 연장근무시간 관리 단위를 월, 분기, 반기, 연 등으로 유연화하는 근로시간 개편안을 발표했지만, ‘과로를 조장한다’는 여론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윤 대통령이 나서서 여론 수렴을 주문했고, 고용부는 이에 따라 설문조사를 거쳐 제도를 개편하기로 했는데 정부 의도와는 거리가 있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노동계는 정책 추진이 무리했다는 입장이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근로시간 제도는 국민을 과도한 노동에서부터 보호하기 위한 보편적 규정”이라며 “14.5%라는 일부 요구 때문에 제도를 변경할 수는 없다”고 했다. 박성우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국제적 노동 기준은 주 52시간제가 아니라 주 48시간제”라며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와 장시간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 연장근로 상한을 오히려 줄여야 한다”고 했다.


건설ㆍ제조 중심으로 60시간제 추진할 듯

정부는 사실상 원안 포기를 선언했다. 이성희 고용부 차관은 “설문조사 결과를 전폭 수용하며 주 52시간을 유지하면서 일부 업종ㆍ직종에 한해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근로시간 개편이 필요한 업종ㆍ직종은 “노ㆍ사ㆍ정 대화를 통해 근로시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만 했다. 대통령실이 이날 한국노총에 대화 복귀를 요청했고, 한국노총이 경사노위 참여를 선언하면서 근로시간 개편 논의가 진전될 가능성도 있다.

정부는 앞으로 제조업ㆍ건설업을 중심으로 ‘주 60시간 근무제’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설문조사를 통해 제조업 55.3%, 건설업 28.7%와 설치ㆍ정비ㆍ생산직 32% 등에서 연장근로 단위 확대가 필요하다는 근로자 의견이 나왔다. 주당 최대 근로시간 한도로는 근로자ㆍ사용자를 아울러 70%가량이 60시간을 지목했다. 윤 대통령도 지난 3월 "주 60시간 이상 근로는 무리"라고 했었다. 다만 근로시간 확대를 반대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내년 총선까지는 급박하게 정책을 추진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양대노총의 한 축인 민주노동조합총연맹도 근로시간 개편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정부는 당초 포괄임금 오남용과 근절대책도 약속했지만, 구체적 개선방안은 내놓지 않았다. 포괄임금제는 초과 근무 수당을 월급에 포함해 일괄 지급하는 방식이다. 사용자의 계산상 편의를 위한 제도인데, 임금 체불과 공짜 근로에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성희 차관은 “수십 년간 현장에서 형성된 포괄임금 계약 관행과 노사·노노 간 복잡한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포괄임금 계약 자체를 금지하는 입법규제는 현장의 혼란과 갈등을 야기해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정지용 기자
최나실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