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업 의료기관서 펜타닐·프로포폴 등 174만 개 '증발'… 불법유통 가능성

입력
2023.11.0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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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시 양도·양수 보고 의무에도 유명무실
"임의폐기·자택보관 중 분실" 불법유통 가능성
보고 누락 시 제대로 된 감시 지침도 없어

최근 4년간 폐업한 의료기관에서 보유하고 있던 마약류 의약품(펜타닐, 프로포폴 등) 174만여 개가 국가 감시망에서 사라진 것으로 드러났다. 의료인들의 도덕적 해이와 감독기관의 허술한 관리가 국내 마약 확산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9일 감사원은 이 같은 내용의 식품의약품안전처 정기감사 결과를 공개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2019~2022년 폐업한 의료기관(병원, 동물병원, 약국 등) 1,000곳 중 920곳에서 재고 마약류 의약품 174만1,738개가 국가 감시망에서 사라졌다. 용량과 형태(정, 앰풀, 패치)가 다양해 정확한 투약 횟수를 추정하긴 어려우나, 사라진 마약류가 모두 투약됐다면 174만 회를 훌쩍 넘길 것으로 보인다. 올해 8월 현재 전라북도 인구(약 176만 명)와 맞먹는 수량이다.

마약류 관리법은 펜타닐 등 의료용 마약과 프로포폴·졸피뎀 등 마취 및 수면제로 사용되는 향정신성의약품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현행법상 폐업 의료기관은 보유하고 있던 재고 마약류 의약품을 다른 의료기관이나 도매상 등에 양도·양수하고 이를 식약처에 보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약은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 향정신성의약품은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하지만 감사원이 13개 폐업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표본 조사를 실시한 결과, 분실했다거나 임의로 폐기했다는 답변이 나왔다. 이를 증빙할 자료도 없었다. 2020년 폐업한 서울 강남구의 A의원과 이듬해 폐업한 대구 달서구의 B의원은 각각 마약류 의약품 1,936개와 450개를 임의 폐기하면서 증빙 자료를 남기지 않았고, 2020년 폐업한 포항시 북구 C의원은 폐업 후 향정신성의약품 5만2,000개를 자택으로 가져와 보관하던 중 2만7,246개를 분실했다고 주장했다.

감사 결과로 확인된 추적 불가 마약류 의약품에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마약들이 대거 포함됐다. 미국에서 심각한 부작용으로 이슈가 되며 '좀비마약'으로 불리는 진통제 펜타닐(레미펜타닐 포함) 4,256개, 향정신성의약품 중 '우유주사'로 불리는 프로포폴 7,078개, 일명 '스페셜K'로 불리는 케타민 1,097개, 식욕억제제인 펜터민(일명 '나비약·펜디메트라진 포함) 8만2,907개 등이다.

프로포폴의 경우 잔량 관리도 허술했다. 앰풀 단위로 포장된 프로포폴은 대개 사용 후 잔량이 남게 되는데, 감사원 감사 결과 최근 4년간 1만1,000여 곳에서 '프로포폴 잔량이 없다'고 보고한 사례가 2,677만여 건에 달했다. 감사원의 지시에 따라 식약처 감시원이 실제로 잔량이 없는지 현장점검을 실시했더니, 보고와 달리 잔량이 존재했다. 5개 의료기관의 4년간 발생한 프로포폴 잔량 추정치는 33만2,809ml로 약 4만7,544명이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이다.

식약처의 부실한 관리 감독도 도마에 올랐다. 제대로 된 감시 지침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감사원은 "상황이 이런데도 식약처는 지방자치단체(보건소)와 현장조사를 실시하지 않고 있다"며 식약처에 "폐업 의료업자의 재고 마약류 처리 감시 지침을 마련하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아울러 표본 조사에서 위법이 확인된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관할 지자체에 고발하도록 통보했다.

식약처는 감사원의 지적과 관련해 "지자체와 적극 협력해 폐업 의료기관의 마약류 의약품 재고 관리를 강화하고, 사용 후 잔량을 거짓 보고한 것으로 의심되는 곳에 대해 집중 점검하도록 지자체에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경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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