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의 균형, 건강한 중년 생활의 필수 조건

입력
2023.11.13 04:30
25면

편집자주

인생 황금기라는 40~50대 중년. 성취도 크지만, 한국의 중년은 격변에 휩쓸려 유달리 힘들다. 이 시대 중년의 고민을 진단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해법들을 전문가 연재 기고로 모색한다.
건강: <4> 일 vs 삶, 황금비율 찾기


‘돈 버는 사람’으로 전락한 슬픈 중년들
“사랑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돈 아닌, 시간”
다양한 영역에 시간ㆍ에너지 분배해야

얼마 전 퇴직한 50대 후반의 한 남성이 필자의 상담실을 찾았다.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해 온 자신을 대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태도에 분개한 그는 급기야 화병이 생기고 말았다. 평생 몸 바쳐 일한 회사를 떠난 것도 속상한데,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며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가슴이 답답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심한 우울감을 호소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같은 집에 거주하며 매일 같은 현관문을 드나드는 사이였지만, 아내와 자식들은 그를 알지 못했고, 그 역시 가족들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그저 ‘돈 버는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장성한 자식들은 갑자기 자신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버지를 불편해했고, 함께한 시간이 부족했던 만큼 아내도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피터슨은 사랑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돈도 명예도 아닌 ‘시간’이라고 했다. 일을 핑계로 오랫동안 가족을 등한시해 온 그에게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라는 통장은 안타깝게도 텅 비어 있었다.

주당 40시간을 법정 최저 기준 근로 시간으로 정하고 있는 현재 우리나라는 Z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워라밸’, 즉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일과 삶의 균형이란, 일과 일을 제외한 다양한 삶의 영역에 시간과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근로자가 삶에 대한 통제감과 만족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과거에는 위 사례의 중년 남성처럼 ‘일’과 직장생활을 중요시했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개인적 삶의 질’을 중시하는 사회적 인식이 생겨났다. 특히 밀레니얼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도적 일꾼으로 등장한 현재 이러한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는데, 이제 ‘일과 삶의 균형’은 더는 젊은 세대만의 관심사라 할 수 없다. 21세기에는 국가와 사회의 번영 못지않게 개인과 가족의 삶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만 19세 이상의 근로자 1만7,510명을 대상으로 ‘일-삶 균형’에 관한 실태를 조사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하루 24시간 중 수면, 출퇴근 및 이동, 식사 및 개인 관리 등 기본적인 시간 사용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시간을 투입하는 주요 삶의 영역은 근로(26%), 가사와 돌봄(10.3%), 자기 계발(3.2%), 여가ㆍ문화(8.1%), 사교활동(2.4%), 휴식ㆍ기타(10.3%)로 나타났다(도표 참고). 전국 평균에 기반한 자료이므로, 각자 자신이 어디에 얼마나 시간을 쓰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금언은 이 경우에도 해당한다. 자신이 중요하게 가치를 두는 영역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려면 적절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일할 때 최선을 다하지만, 일에서 벗어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할 시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돌보고 성장시킬 시간에 쓸 에너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피곤해서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없고, 일에 지쳐 건강을 돌보거나 즐기던 취미조차 누릴 시간을 내기 어렵다면, 일을 효율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신호이다. 불필요한 부분까지 업무로 여기며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일을 핑계로 가족이나 개인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일하느라 삶에서 중요한 다른 부분을 놓치고 있다면, 지나치게 일하고 있다고 판단해도 된다.

미국 베일러대학의 마이클 프리슈 교수를 비롯해 ‘삶의 질’을 연구하는 긍정심리학자들은 중년의 행복을 위해서는 직업적 성공이나 부를 얻고자 애쓰는 것보다 다양한 영역에 시간과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오늘날 ‘백세 시대’라지만, 수명이 길기만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삶의 질을 잘 관리하는 지혜로운 중년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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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서울상담심리대학원 교수ㆍ<심리학이 나를 안아주었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