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MVP와 도쿄대생 동시 배출한 일본 시골 학교의 비밀

입력
2023.11.14 04:00
1면
[K스포츠의 추락, J스포츠의 비상]
<2> 외길 인생과 이도류 인생
오타니 모교 하나마키히가시고 이유 있는 고집 
전교생 중 84%가 공부·운동 병행 '이도류' 생활 
야구부원 109명 "의사, 트레이너 등 다양한 꿈" 
감독, 도쿄대 진학 목표 부원 위해 '공부방' 마련 
오타니 같은 선수에게도 학업엔 특별 배려 없어 
'외길' 강요 안 하니 가입 늘어 "부담 없이 운동"

편집자주

한국 스포츠, 어떻게 기억하나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크게 도약한 우리 스포츠는 국민들에게 힘과 위로를 줬습니다. 하지만 저력의 K스포츠가 위기에 섰습니다. 프로 리그가 있는 종목조차 선수가 없어 존망을 걱정합니다. 반면, 라이벌 일본은 호성적을 거두며 멀찍이 달아났습니다. 희비가 엇갈린 양국 스포츠 현실을 취재해 재도약의 해법을 찾아봤습니다.

일본 야구의 상징인 오타니 쇼헤이(29∙LA에인절스)의 모교인 일본 이와테현하나마키히가시고교 야구장 뒤편에는 1평(3.3㎡) 남짓한 컨테이너가 있었다. 안에는 긴 책상과 의자 2개가 놓였고, 의자에 앉으면 창밖으로 야구장이 한눈에 보인다. 코칭스태프가 선수들의 연습 장면을 보거나 쉴 때 쓰는 공간일까.

"감독이 아닌 학생이 쓰는 공부방이에요."

스승으로 알려진 사사키 히로시(48) 야구부 감독은 ‘비밀의 방’의 용도를 설명했다. “도쿄대 입학을 꿈꾸는 부원이 있어 야구를 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특별 공간을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고2 때 전국대회인 메이지진구대회에 출전할 만큼 실력이 뛰어났지만, 공부에 더 소질을 보여 감독도 그 길을 추천했다. 이 부원은 고3 때도 유니폼을 입고 동료들의 연습을 도우며 공부에 매진했다. 사사키 감독은 “우리 야구부에는 직업 선수가 아닌 다른 목표를 가진 아이들이 더 많다”며 “이들의 가능성을 넓혀주고 동기를 부여해주는 게 교사가 할 일”이라고 했다.

1956년 문을 연 이 학교의 첫 도쿄대 입학생은 오마키 마사토(23)라는 야구부원이다. 그는 2021년 스포츠 분야가 아니라 문과대학에 합격했다. 시골 학교 야구부가 미국 프로야구 MVP(오타니)와 도쿄대 합격생을 모두 배출한 것이다. 감독이 야구만 잘하라고 다그치지 않고, 모든 선수가 운동에만 목숨 걸지 않는 분위기. 일본 야구의 힘은 학업과 운동 중 한쪽만 강요하지 않는 교육 환경에서 나온다.

야구부원 데리고 도쿄대 가 사진 찍은 감독 “넌 여기 합격할 수 있다”


“고교 3년은 인생을 지탱하는 토대를 다지는 시간이죠. 주체적으로 살 힘을 길러주는 게 가장 중요해요.”

지난달 18일 학교 응접실에서 기자를 만난 하나마키히가시고 고다시마 준조 교장은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는 ‘문무양도’(文武兩道)를 강조했다. 전교생 721명 중 84%가 야구, 소프트볼, 수영 등 운동부 소속이다.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는 오타니의 별명이 ‘이도류’(二刀流)인데, 그의 후배들은 다른 의미에서 이도류(학업∙운동 병행)인 셈이다. 이 학교는 오타니처럼 스포츠에 특화한 학생들만 다니지 않는다. 대부분은 내신 성적이나 대입센터시험(우리의 수학능력시험) 등을 통해 대학 진학을 노리는 평범한 아이들이다. 고다시마 교장은 “부카츠(部活∙부활동)는 학습과 마찬가지로 교육의 일부분”이라면서 “인격 형성 등 인간으로서 기본을 닦는데 꼭 필요한 활동”이라고 단언했다.

부원이 109명에 달하는 야구부도 같은 철학으로 운영된다. 사사키 감독은 단순히 야구 선수를 키우는 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야구를 할 줄 아는 훌륭한 인간을 키우는 게 목표다. 야구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다지고자 한다면 실력과 무관하게 부원으로 받아준다. 감독과 함께 야구부를 운영하는 사수가 히로유키 야구부장은 “오타니나 기쿠치 유세이(32∙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우리 학교를 택한 건 이런 교육 이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운동부 감독들은 기술적인 조언자 역할에만 그치지 않는다. 부원이 어떤 꿈을 꾸든 가능성을 살려주는 멘토가 돼주기에 진로 상담도 자주 한다. 사사키 감독은 “부원들의 꿈을 들어 보면 트레이너와 의사, 도쿄대 진학 등 각양각색”이라면서 “이들이 야구를 통해 삶의 기본기를 익히고, 각자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도쿄대생’ 오마키가 이 학교 야구부 출신인 건 우연이 아니다. 사사키 감독은 ‘일본 최고 대학에 가고 싶다’는 제자의 꿈을 1학년 때 듣고는 도쿄대 교정에 함께 갔다. 그는 오마키에게 “충분히 입학할 수 있다”고 격려한 뒤, 캠퍼스에서 사진을 찍어 기숙사 한쪽에 붙여 놓도록 했다. 2인 1실을 쓰는 다른 부원들과 달리 방을 홀로 쓰도록 했다. 훈련을 마치고 늦은 밤까지 공부해야 하는 제자를 배려한 것이다.

하나마키히가시고는 오타니의 인생 계획표로 유명해진 ‘만다라트 차트’를 활용해 학생들의 목표 달성을 돕는다. 정사각형 표 중앙에 최종 목표를 적고, 이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구체적 노력을 8개 방향으로 써나가는 식이다. 마스모토 준페이 입시홍보실장은 “모든 입학생에게 만다라트 차트가 담긴 다이어리를 나눠 준다”고 했다. 다수의 야구부원들도 야구와 관련 없는 목표를 세워 당장 해야 할 일을 스스로 고민한다. 예컨대 연봉 1,000만 엔(약 8,600만 원)을 주는 회사에 취업하거나 시험에서 100점을 맞는 게 목표인 부원도 있다.


"낙제점 이하면 졸업 불가, 부활동도 금지"

하나마키히가시고는 학생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 필요한 ‘삶의 근육’을 키워주는 것을 중요시한다. 모두에게 예외 없이 학업을 철저히 시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타니나 기쿠치처럼 직업 운동선수를 꿈꿔도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 은퇴 이후 삶까지 내다보기 때문이다. 고다시마 교장은 “‘아키텡’(赤点∙낙제점)을 못 넘으면 졸업할 수 없고, 부활동도 금지된다”면서 “다행히 운동을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 공부도 잘한다. 적극성 등 공부와 스포츠가 요구하는 덕목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 오타니의 내신 점수는 3년 평균 85점, 기쿠치는 80점이었다. 사사키 감독은 “바늘구멍 같은 경쟁을 통과해 성인 야구 선수가 된다고 해도 보통 30세를 전후로 유니폼을 벗는다”면서 “100세 시대에 남은 70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건 지력(智力)”이라고 강조했다.

하나마키히가시고는 야구부원을 학년별로 한 학급에 배치한다. 마스모토 실장은 “아이들이 경기 출장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빠져야 할 때가 있다”면서 “한 학급에 모아서 공부하면 보충수업을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낙제 점수만 넘으라고 무작정 몰아붙이는 대신, 낙오되지 않도록 학교가 세심히 배려하는 것이다.

시골학교 야구부에 100명이 넘는 부원들이 몰린 것도 이런 철학 때문이다. 오직 운동에만 모든 것을 거는 ‘외길 인생’을 강요하지 않으니, 학생이나 학부모 입장에서 부담이 덜하다. 운동을 하다가 이탈하더라도 또 다른 길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본은 선수층이 두텁고, 엘리트 야구계는 이 가운데 옥석 고르기를 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야구뿐 아니라 축구, 농구, 배구, 육상 등 모든 종목에 적용된다. 일본 스포츠의 저변이 넓은 이유다.

교사가 된 고시엔 스타 "동료 누구도 프로 진출 목표 아냐"

오타니라는 ‘야구 아이콘’을 배출한 하나마키히가시고가 특별해 보이지만, 일본 고교의 기본 시스템은 이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운동부 선수들이 다양한 진로를 택할 수 있도록 열린 운영을 한다. 심지어 고교 무대에서 최고 성과를 냈던 선수들조차 ‘운동 외에는 어떤 길도 없다’는 사생결단식 사고를 하지 않는다. 사가현 가시마고교의 보건체육교사인 구보 다카히로(34)가 대표적이다. 그는 꿈의 무대인 고시엔 대회(전국고교 야구선수권대회)에서 2007년 우승한 사가키타고교의 에이스 투수였다. 당시 우승 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선수단을 촬영하기 위해 헬기가 떴을 만큼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평범한 삶을 택했다. 구보는 지난달 13일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당시 동급생 중 프로 진출을 목표로 운동한 선수는 없었다”면서 “고시엔 본선에 나가 보자고 의기투합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 사가키타고는 부활동이 공부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야간 훈련을 전면금지했다. 구보는 현재 가시마고교의 야구부 감독을 겸임하고 있다.

다른 종목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소프트볼 금메달리스트인 사토 리에(43) 도쿄여자체육대 교수는 소프트볼 특기생으로 고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업이 가장 중요하고, 운동은 그 다음이라는 게 학교 방침이었다. 사토 교수는 “성적이 좋지 않으면 ‘저런 애가 소프트볼을 해?’라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그는 입학 당시 반에서 꼴찌였지만, 고3 때는 상위권이었다고 한다.

운동부 선배가 후배의 학업을 챙겨주는 문화도 있다. 공부로 대입을 준비하며 축구부 활동도 하는 도쿄 스기나미소고 고교의 야마다 리호(18∙3학년)는 “2, 3학년 선배들이 1학년과 함께 아침 공부를 하며 가르쳐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야마자키 가쓰야 도쿄 간다여학원고 소프트볼부 지도교사는 “우리 부원의 교과 성적이 떨어지면 영어, 수학 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귀띔해준다”면서 “그러면 그 아이를 남겨놓고 방과후수업을 한다”고 말했다. 이 학교 소프트볼부는 60개에 달하는 도쿄 여자팀 중 랭킹 1위이지만, 직업 운동선수가 되고자 하는 부원은 10% 정도뿐이다.

'부카츠 활동에 열중하면 공부할 시간이 줄어 학업 성적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본 내 연구 결과는 다른 결론을 보여준다. 일본국가교육정책연구원이 2017년 전국학력시험 결과를 분석해 보니 중학교에서 부카츠를 전혀 하지 않은 학생의 정답률이 일본어, 수학 등 모든 교과에서 가장 낮았다. 반면 하루 1~2시간 정도 부활동을 한 학생의 정답률이 가장 높았고, 2~3시간 활동한 학생들이 다음으로 높았다. 매일 3시간 이상 부활동을 한 학생의 정답률은 전혀 하지 않은 학생 다음으로 낮았다. 적당한 부활동은 학업 성적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명 낳아 키우는 시대…성공 확률 희박한 스포츠에 '올인' 강요는 가혹"

한국에선 운동을 택한 학생은 운동만,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만 시키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우리 시스템이 유효기간을 다했다는 지적은 대한해협 너머에서도 나온다. 한일 스포츠 문제를 30년간 취재해온 오시마 히로시(62) 작가는 “아이를 2~3명 낳아 키울 때는 한 명쯤 운동을 시켜서, 잘 되면 덕을 보고 안 풀리면 부모가 도와주면 됐다”면서 “하지만 1명만 낳는 시대에 성공 가능성이 1%도 안 되는 엘리트 스포츠에 인생을 걸라고 주문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스포츠의 순기능에 주목하고,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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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테·도쿄= 유대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