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매운 가사였어?'
이런 제목이 달린 그룹 방탄소년단 멤버 정국의 노래 '세븐' 한국어 가사 번역 영상은 유튜브에서 31일 기준 조회수 828만 건을 기록했다. 가사가 전부 영어로 된 정국의 노랫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고 싶어 이 노래 한국어 번역 영상을 찾아본 이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정국뿐 아니라 블랙핑크 멤버 제니도 10월 낸 신곡 '유 앤드 미'를 모두 영어로만 불렀다. 온라인엔 '가사가 이거(뜻)였어?'라며 두 간판 K팝 아이돌의 노랫말을 한국어로 번역한 영상이 굴비 엮이듯 줄줄이 올라왔다. K팝 아이돌이 최근 잇따라 노래를 영어로만 발표하다 보니 한국 가수가 부른 노래를 한국어로 번역한 영상을 찾아보며 곡을 즐겨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K팝 아이돌이 부른 노래에서 한국어 노랫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외국 작곡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곡 수익 분배 관행으로 한국 작사가들은 속앓이 중이다. K팝의 세계화로 급변하고 있는 음악 시장 풍경이다.
11월 3일 발매될 정국의 첫 솔로 앨범 '골든'엔 한국어 노래가 단 한 곡도 없다. 앨범에 실릴 11곡 모두 가사가 영어다. K팝 아이돌이 전곡을 영어로 부른 정규 앨범을 국내외에서 동시 발매한 일은 이례적이다. 방탄소년단 일곱 멤버 중에서도 전곡이 영어로 된 솔로 앨범을 낸 멤버도 정국이 처음이다. 그가 앨범 발매에 앞서 미리 공개한 '세븐'과 '3D'가 잇따라 영어로 제작된 것을 두고 팬들 반응은 제각각이다. "한국어로 부를 때의 청초한 목소리와 달리 영어로 부를 땐 섹시함이 부각"되고 "더 듣기 편하다"고 흥미로워하는 팬도 있지만 "한국어 노래에 대한 갈증"이 느껴진다고 아쉬워하는 이도 있다.
국내 시장에서의 갑론을박에도 불구하고 K팝 기획사들이 영어곡 제작에 적극 나서는 이유는 영미권 시장 확대다. K팝의 아시아 시장 성장이 정체됐다는 위기의식에서 영어곡으로 북미 시장을 공격적으로 공략해 활로를 찾겠다는 것이다. 블랙스완처럼 한국인 없는 그룹 기획이 K팝의 초국적성을 확장하려는 전략이라면, 영어로 된 K팝 제작은 한국어로 대변되는 K팝의 특수성을 벗어나려는 시도다.
K팝 기획사들의 이런 제작 방식의 변화는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블룸버그 주최 '블룸버그 스크린타임'에서 강조한 'K팝의 팝송화' 발언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방 의장은 "미국 기반 세계 음악시장에서 더 많은 팬을 얻기 위해선 좀 더 가볍게 팝의 일환으로 K팝이 소비되는 게 필요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선 외양과 내포, 즉 양쪽에서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룹 르세라핌의 '퍼펙트 나이트' 등 최근 1년 새 K팝 아이돌그룹의 영어곡 발표가 잇따르는 배경이다. 요즘 K팝 아이돌그룹 노래에서 한국어 비중은 5년 전과 비교해 거의 반 토막 수준이다. 멜론, 지니뮤직 등 8개 플랫폼에서의 음원 소비량을 집계하는 써클차트의 김진우 수석연구위원에 따르면 올해 1~6월 디지털 차트 톱400에 오른 여성그룹 노래에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41.3%로 2018년 동기 대비 18.9%포인트 증가했다.
문제는 K팝의 강점으로 꼽혀 왔던 메시지의 약화다. 한국어 가사는 외국 청취자들이 바로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곡에 담긴 성장과 치유의 메시지가 K팝의 단단한 해외 팬덤의 밑거름이었는데 외국 작사가가 영어로 만든 노랫말엔 이런 서사를 도통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성환 음악평론가는 "마약과 성적인 이야기로 범벅이 된 영미권 팝송과 달리 K팝엔 청년 성장 서사가 부각돼 해외에서 골수팬을 만들었다"며 "그런데 영어곡으로 이 특징이 사라지면 '영미 팝송과 K팝이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퍼져 든든했던 기반이 약해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주류 영미 문화의 대안으로 세계 음악 시장에서 조명받은 K팝이 영어로 부르는 흔한 사랑 노래로만 발표되면 공든 탑에 금이 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김도헌 음악평론가는 "미국 음악 시장에서 라틴, 아프로비츠(Afrobeats·아프리카 전통 리듬을 기반으로 한 팝 음악) 음악이 주목받는 건 그 장르가 지닌 지역성 때문"이라며 "영어로 곡을 발표한다면 그 방식을 통해 기존과 달리 어떤 색다른 즐거움과 메시지를 줄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줘야 하는데 단순히 '글로벌을 위해선 영어로'라는 방향이 장기적인 K팝의 성장에 득만 될지는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K팝의 세계화는 국내 창작 환경에도 예상치 못한 그늘도 드리우고 있다. 국내 작사가들은 해외 작곡가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도록 곡 권리 비율이 책정돼 불합리하다며 '울며 겨자 먹기'로 합작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최근 발간한 '2023 음악산업백서'에서 유명 작사가 A씨는 "국내 작곡가가 만든 곡의 지분 비율은 기본적으로 작곡과 작사가 각각 50%씩인데 해외 작곡가가 작업한 곡의 경우 곡에 대한 (수익) 지분을 외국 작곡가가 87.5%를, 작사가가 12.5%를 가져간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해외에선 이렇게 수익 배분이 이뤄진다는 게 현지 업계 관행이라고는 하지만 국내 실정을 고려해 해외 작곡가와 국내 작사가의 합작 시 그 수익을 합리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외국 작곡가가 작곡한 아이돌그룹 노래 합작에 참여한 작사가 B씨는 본보와 통화에서 "외국 작곡가가 작곡한 음원을 K팝 기획사나 퍼블리싱 회사에 보낼 때 가사의 콘셉트를 같이 보내기도 하지만 그 콘셉트대로 반드시 가사를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주제와 다른 방향으로 색다르게 해석해 노랫말을 쓰기도 한다"며 "단순 번역이나 개사가 아닌 경우 합리적인 권리 분배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