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본선 4회 진출에도 정작 본선에선 4무 10패를 한 한국 축구 위기 타개와 개최국 체면을 세우기 위해 축구협회가 택한 인물이 거스 히딩크 감독이다. 화려한 경력, 유창한 언변과 달리 평가전 성적은 초라했다.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라는 호언은 사기꾼 비난으로 돌아왔다. 2002년 월드컵 개막 직전 평가전부터 대표팀은 달라진 기량을 선보여 결국 4강 위업을 이뤘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선 패전 직전 전원 공격수 투입이라는 전대미문의 작전으로 기어코 빗장 수비를 깼다. 흥분한 팬들은 ‘축구계의 이순신’이라고 상찬했다.
□‘8888577’ 프로야구 원년 구단인 롯데자이언츠의 2000년 초반 팀 순위다. 꼴찌를 전전한 암흑기에 롯데의 선택은 프로야구 첫 외국인 감독이었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인종 차별적 욕을 극성팬들로부터 들었지만 화끈한 야구로 체질을 바꿨다. 더그아웃에 대문짝만 하게 붙인 ‘No Fear’는 공격 야구 구호가 됐다. '진다는 두려움을 버리라'는 그의 말은 만년 꼴찌 팀을 깨웠고 3연속 플레이오프에 올리는 밑바탕이 됐다.
□외국인 감독 진출의 길을 턴 두 사람의 성공 배경에는 무엇보다 정실, 연고 타파다. 축구계나 야구계 모두 여기에 발목 잡히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한국 사회 고질병에서 자유로웠던 두 사람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이 쉬웠다. 히딩크는 선후배 위계를 타파하기 위해 이름과 반말만 쓰도록 했다. 수컷 고릴라들이 다투는 듯 큰 입을 벌리는 로이스터 감독과 포수 강민호의 기괴한 승리 세리머니는 감독·선수를 뛰어넘는 유대를 보여줬다.
□푸른 눈의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가 보선 패배 수렁에 빠진 여당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4대가 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누구보다 더 한국적인 그를 외국인 감독에 견주는 게 어폐가 있기는 하나 그 역시 “내 얼굴이 다르지 않나"라며 변화를 상징한다고 했다. 여야 모두 위기 돌파용으로 혁신위를 띄웠지만 성공사례는 많지 않다. 국가대표 축구, 프로야구 감독처럼 '독이 든 성배'라 할 수 있다. "낙동강 하류 세력은 뒷전에" 등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여당에 파문을 일으킨다. ‘정치권 메기’로 야당에도 새 바람을 일으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