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나의 후원자는 개' 윤고은의 기묘한 세계

입력
2023.10.28 04:30
11면
'대거상' 수상작가 윤고은 장편 '불타는 작품'
세계적 미술 후원 재단의 수장이 개라는 설정
단 하나의 조건 '완성작 중 하나를 소각한다'
기이한 상황 속 빨려 들어간 당신의 선택은 
자본과 예술 관계, 주체성에 대한 질문 담아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로버트 재단에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은 생계 유지를 위해 배달 일을 하는, 한때 미술계 유망주에게 찾아온 기회다. 후원 조건이 특이하다. 창작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완성한 미술 작품 중 하나를 전시회에서 불태워야 한다는 것. 단, 소각 대상 작품은 재단의 수장인 로버트가 결정한다. 그런데 로버트는 개다. 반갑다고 꼬리 흔드는, 그 개. 승낙하면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이 제안을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장편소설 '불타는 작품'은 자본과 예술의 뒤틀린 관계를 파고든 일종의 스릴러다. 아시아 작가 최초로 영국 추리문학상인 대거상(2021)을 수상한 윤고은(43) 작가의 신작이다. 자신의 소설집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2016)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 등을 토대로 세계를 확장했다. 후원자가 개고, 개가 선택한 작품을 소각해야 한다는 기이한 설정 속에는 예술의 가치, 존재의 주체성에 대한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블랙코미디적인 면모도 갖췄다.

화자인 '나(안이지)'의 결정은 승낙이다. 소설은 안이지가 4개월 동안 미국 팜스프링스의 로버트 미술관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여정을 따라간다. 재단의 수장이 개라는 터무니없는 설정을 예삿일로 느끼게 한 건 오롯이 윤고은 작가의 힘이다. 재단 내 사람들 모두가 로버트의 예술적 감각과 권위를 믿는다. (정확도를 검증할 수 없지만) 통역을 통해 예술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사람들을 초대해 호스트로서 식사를 함께 하는 로버트. 그가 중심이 돼 재단의 일상을 유지하는 완벽한 시스템이 모든 의구심을 압도해 버린다. 심지어 로버트 전용 복도는 인간의 눈높이보다 위쪽에 있다. 권력의 무게 추가 어디로 기울어 있는지를 일상적으로 체득하게 만드는 세계인 셈이다.

로버트를 개가 아니라 로버트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소설은 또 다르게 읽힌다. 명성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허상의 상징을 부여잡고 지탱하는 자본가들, 그들의 힘을 빌려 이익을 보려는 주변 인물들, 무언가 혼란스럽고 자괴감까지 느껴지지만 목전의 성공을 놓칠 수 없어 흔들리는 젊고 가난한 예술가.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없는 르포가 된다.

작품을 소각한다는 설정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 경매 낙찰 직후 작품 일부를 파쇄시킨 영국 작가 뱅크시,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인 작품에서 바나나를 먹어버린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같은 작가들을 떠올리게 된다. 파격적 퍼포먼스로 예술 근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 이들이다. 역설적으로 퍼포먼스 후 이들 작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소각'이라는 행위도 같은 맥락이다. "작가가 무엇을 그리든 그중 하나가 소각용으로 정해지면 작가는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질 테고, 로버트 미술관 소각식의 주요 연료는 바로 작가의 마음"이다. 소각식은 엄청난 마케팅 효과를 일으켜 작가를 단숨에 스타로 만든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최고작은 '불타버린 작품'이 되고 이후에는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예술작품의 가치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기후위기도 하나의 소재다. (윤 작가는 전작 '밤의 여행자들'에서는 재난 여행을 다뤘고, '도서관 런웨이'의 소재인 결혼 보험에는 기후위기 특약을 넣는 설정을 만들기도 했다.) 심각한 산불로 미술관이 위치한 캘리포니아 전역이 고통받지만 미술관 내 구역은 엄청난 양의 물과 인공 장치들을 통해 쾌적한 환경이 유지된다. 환경에 신경을 쓴다고 말은 하지만 로버트는 산불 사진을 보면서 색감에 대한 의견을 말할 뿐이다. 더군다나 이 상황에서도 소각식 계획을 고집한다. 그 잔인함이 낯설지 않다.

후반부 안이지의 행보는 주체성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그는 그렇게 원했던 곳에서 언제부턴가 탈출을 꿈꾸게 된다. 재단 직원들은 물론 지역 사회 전체의 압박을 느끼고 자신 고유의 사유와 존재가 희미해지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극심한 경쟁 속에 사는 우리의 모습을 닮지 않았는가. 작가의 질문도 여기에 있다. "우리도 책처럼 저마다 원본인데, 과잉과 과속의 시대에 그 중요한 사실이 자주 누락된다. 각자의 고유성을 증명할 만한 모서리가 떨어져나가거나 닳아서 뭉툭해지고,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뻗어나간다." ('작가의 말')

진달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