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운동회와 김밥

입력
2023.10.25 22:30
27면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하늘대는 코스모스를 보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그중 하나가 가을 운동회다. 누구나 어린 시절 운동회를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질 게다. 강원도 산골의 운동회는 그해 마을의 가장 큰 잔치였다. 동심과 손을 잡은 동네 어른들은 개구쟁이처럼 뛰고 춤추고 노래하며 가을의 전설을 썼다.

“코스모스가 우거져 피어 있는 운동장 가운데 높다란 장대를 세워 태극기를 달고, (중략) 홍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저마다 빨간 얼굴이 돼 응원하는 모습이 선하다. 농촌의 운동회는 어린이들의 큰 행사요, 온 면민(面民)의 큰 행사다.” 수필가 천관우(1925~1991)도 ‘신세시기(新歲時記)‘ 가을 편에서 어린 시절 운동회 풍경을 그렸다.

엄마는 이른 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달걀과 밤·고구마를 삶고, 사과·배·감을 깎고, 김밥을 쌌다. 소금과 참기름으로 간한 밥에 시금치 단무지 달걀 어묵만 넣고 말아도 김밥은 꿀맛이었다. 입이 터져라 김밥을 먹고 사이다로 목을 축이면 그 어떤 경기에서도 이길 자신이 생겼다.

운동회는 영국에서 시작됐다. 1746년 공립 웨스트민스터 학교에서 열린 크리켓 경기를 최초의 운동회로 꼽는다. 우리나라에선 1896년 5월 2일 서울 성북구 동소문 밖 삼선평(평양의 삼선평이라는 주장도 있다) 영어학교에서 열린 운동회를 최초로 삼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운동회는 승부를 떠나 화합하고 즐기는 축제의 한마당이다.

운동회는 신나게 치르는 행사다. ‘치르다’는 무슨 일을 겪어 낸다는 뜻의 동사다. 운동회뿐만 아니라 시험, 장례식·결혼식, 선거 등에도 어울린다. 살다 보면 생각지 않게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유명세도 치른다. 또 여행을 떠나 방값과 밥값 등 돈을 지불할 때도 치르다가 적절한 표현이다. “저녁을 치르고 산책에 나서던 참이다”처럼 치르다에는 먹는다는 뜻도 있다.

치르다는 활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치러, 치르니, 치러서, 치르고 등과 같이 ‘으’불규칙 활용되기 때문이다. 어미 '-어'가 오면 '-으'가 탈락해 '-러'로 발음된다. “계약금을 치러라” “수능을 잘 치러라”처럼 쓰면 된다.

‘치루다’가 바른 말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가 많을 게다. 1989년 3월 이전엔 치루다가 표준어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하자. 현재 우리말에 ‘치루다’는 없다.

지방엔 학생 수가 적어서, 도시는 시끄럽다는 민원에 운동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아이들의 꿈과 추억을 빼앗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안 좋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듣고 싶다.


노경아 교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