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어느 날 저녁. 가족과 식사를 하고 설거지를 식기세척기에 맡겨 두고 식탁에 앉아 한숨 돌리려던 차였다. 느닷없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식기세척기 문이 열렸다. 내부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이 났음을 직감했다. 119에 신고하자 곧 소방대원 십여 명이 도착했다. 매캐한 냄새에 아파트 주민 몇몇은 집 밖으로 대피하기도 했다. 다행히 불은 금방 진압됐다. 화재조사관은 식기세척기를 거꾸로 세우고, 겉면을 뜯어냈다. “여기가 까맣게 탔네요.” 복잡한 전기 배선 사이로 플라스틱이 녹아내린 부분이 보였다.
화재 후 제조사의 처리과정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구입한 지 2년 조금 넘은 삼성전자 식기세척기였다. 고객센터에 화재 사실을 신고하니 한 시간도 안 돼 관계자가 찾아왔다. 피해 정도와 원인을 살펴보려는 걸로 생각했지만 어딘가 좀 이상했다. 침착하게 스마트폰으로 식기세척기가 있던 곳의 콘센트 등을 집중적으로 찍더니 식기세척기 내부도 꼼꼼히 촬영했다. 마치 경찰 수사관이 증거물을 채증하는 듯했다. 화재로 인한 손실 정도를 살피거나 건강 이상을 걱정하는 물음은 없었다.
식기세척기 화재를 경험하고, 제조물책임법을 알게 됐다. 제조물의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하면 제조사가 피해를 보상하는 법률인데, 제품 결함 입증을 위해 소비자가 ‘정상적으로 제품을 사용했음’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 내 경우 화재 원인을 알 수 없다면 식기세척기를 정상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평소 사용 시 블랙박스 영상처럼 찍어서 보관하고 있었어야 한다. 일상생활을 기록으로 남겨두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제서야 제조사 관계자가 부주의한 사용(가연성 식기)이나 누전 등을 꼼꼼히 살핀 이유를 알게 됐다. 분쟁이 발생하면 제조사는 더 이상 소비자의 편이 아니다.
제조물책임법은 국회에서 개정 논의가 진행 중이다. 개정안은 결함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하는 것이 골자다. 개정안은 일명 ‘도현이법’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시에서 60대 여성이 몰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급발진 의심 사고를 내 12세 손자 도현군이 사망한 사건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당시 사고로 아들을 잃은 이상훈씨가 ‘피해자가 제품의 결함을 입증해야 하는 부분’이 부당하다며 법 개정 청원을 올려 국회 논의로 이어졌다.
이씨는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소프트웨어 결함은 흔적이 남지 않아 사고 원인 입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그런데도 현행 제조물책임법은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차량에 결함이 있음을 비전문가인 운전자나 유가족이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청원의 이유를 밝혔다.
소비자는 제조사와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소비자와 제조사의 정보는 비대칭적이다. 제품의 특성이나 위험성 같은 정보는 소비자보다 제조사에 더 많다. 소비자가 복잡한 제품을 조사해 결함을 발견하는 건 물리적으로 매우 어렵다. 더구나 불시에 발생하는 급발진 사고라면 소비자가 정상 사용 증거를 제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다행히 개정안은 여야 모두 공감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공정위가 반대 의견을 냈다거나, 정부의 태도가 미온적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정부와 공정위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약자인 국민, 소비자 보호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함을 기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