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대책 쏟아졌지만 '구멍 숭숭'…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입력
2023.10.25 11:00
2면
[임대왕 추적기: ⑤전세사기 끊이지 않는 이유]
저리 대출 중심 대책에 "또 빚 내란 거냐" 반감
'사기 의도' 증명 요건 탓 피해자 인정부터 난항
보증보험 가입의무 어겨도 과태료 부과 37건뿐


편집자주

대규모 전세사기 사건이 수원에서 또 터졌습니다. 확인된 피해규모만 671세대(세입자)입니다. '정씨'라는 임대인이 수십 채 건물을 보유하며, 수백 건 임대차 계약을 맺으며 수백억 대 전세보증금을 긁어모았습니다. 정씨는 어떻게 이런 '부동산 제국'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요? 정씨의 정체를 추적하고, 사기가 근절되지 않는 전세제도의 맹점을 짚어봤습니다.


"전세사기 대책만 믿고 있었는데, 지금 신용불량자 되기 직전이에요."

서울 구로구에 살던 김모(39)씨는 지난해 '2400 조직'으로 불리는 전세사기 일당에게 당해, 전세금 2억8,500만 원을 잃었다. 남편과 아이까지 세 식구 살 곳이 당장 필요했던 그는 금융당국이 홍보하는 '전세사기 피해자 특례보금자리론'을 이용하기로 했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살던 주택을 낙찰받거나 신규 주택을 구입하면, 각각 낙찰가액의 최대 100%, 구매가의 80%를 대출해주는 상품이다. 소득 제한 같은 조건이 없는 상품이었다.

그러나 이달 초 집을 낙찰받고 대출을 일으키려던 김씨는 바뀐 조건 때문에 망연자실했다. 불과 2주 전쯤 갑자기 '부부 합산 연소득 1억 원 이하' 소득 요건이 생겨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된 것. 정부가 특례보금자리론 대출을 조이면서, 전세사기 등 예외 조항을 남겨두지 않고 모두 소득 요건을 걸어버린 탓이다. 김씨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30대 맞벌이 부부는 고려하지도 않은 게 분명하다"며 "낙찰받은 집 대금을 어떻게 치러야 할 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지난해부터 발생한 대규모 전세사기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는 특별법(전세사기피해자법)과 금융지원 조치 등 대책을 잇달아 쏟아냈다. 제도적인 예방 대책도 이어졌다. 그러나 그런 대책들마저 현실성이 없고 제도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어, 피해자들의 회복 속도는 한없이 더디다. 이번 수원 전세사기 의혹에서도 볼 수 있듯, 추가 피해도 끝모를 정도로 이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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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세심하지 못한 대책

김씨가 받으려 했던 특례보금자리론의 기준 상향은 어긋난 '세심하지 못한 정책'의 대표 사례다. 정부는 특례보금자리론 출시 이후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심상치 않자 이 대출의 소득 기준을 높였는데, 여기서 전세사기 피해자의 상황은 고려되지 않았다.

정책의 '운영 미스'뿐 아니라 '설계 미스' 비판도 피하긴 어렵다. 애초 전세사기 피해자용 보금자리론을 이용한 실적 자체도 부진하다. 특별법이 시행된 올해 6월 이후 4달간 이용 건수가 단 12건에 그쳤다. 비슷한 내용의 주택도시기금 디딤돌대출 이용은 6건이었다.

이용률이 저조한 이유는 제도 자체의 한계 때문이다. 결국 이 대책의 핵심은 '사기당해 보증금 떼인 피해자들에게 추가로 빚을 내주는 것'이다. 수원 전세사기 피해자인 함모(33)씨는 "정부의 대책은 임대인이 사기 친 금액을 임차인이 갚고, 대출을 더 받아 살 곳 알아서 찾으라는 식"이라며 "전 재산을 잃었는데 어떻게 대출을 또 받겠냐"고 헛웃음을 지었다. 전체 피해 거주 형태의 26%에 달하는 오피스텔은 준주택으로 분류돼 특례보금자리론 혜택 대상에서 아예 빠졌다.


②피해자 인정부터 난항

구제를 받으려면 공식적으로 피해자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 첫 단계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전세사기특별법에 따르면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해선 △주택의 인도와 전입신고를 마치고 확정일자 갖추기 △임대차보증금 3억 원 이하(시도별 여건 고려해 2억여원 내로 상향 조정 가능) △다수 임차인에게 임대차보증금반환채권 변제를 받지 못하는 피해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것으로 예상 △임대인이 임차보증금반환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의도가 있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 이유 존재 등 4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신청자 중 피해자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건 552건(이의신청 기각 제외)이다. 이 중 96.2%(531건)가 마지막 조건인 '임대인의 기망, 사기 의도 요건'에 걸렸다. 집주인이 돈을 돌려주지 않을 의도를 가지고 임대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별법 제정 당시부터 이 '사기 의도' 파악이 쉽지 않을 거란 지적이 있었는데, 그대로 현실화한 셈이다.

결국 피해 회복을 위해선 정부가 보증금반환채권 등을 매수하는 식으로 피해자를 먼저 구제한 뒤 임대인 등으로부터 피해금을 회수하는 '선(先)구제 후(後)회수' 방향의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임재만 세종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거주 주택) 경·공매는 오래 걸리고, 후순위면 경매가 진행되도 손해 보전을 못 받아 피해자의 고통이 크다"며 "당장은 정부 손해가 좀 있어도 공공이 나서서 해결하고 나중에 정산하는 게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짚었다.

③현장 관리도 미흡

정부의 관리 미흡도 문제다. 지난해 개정된 민간임대주택에관한특별법은 '임대 보증금 보증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임대사업자에게 지자체가 보증금 10%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고 있다. 임대 보증보험은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대신 보전해주는 상품이기에 피해 예방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지자체가 지난해 과태료를 매긴 사례는 단 37건에 불과했다. 올해 상반기 과태료 부과 건수는 아직 집계되지도 않았다. 사실상 단속을 안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수원 전세사기 피해자인 윤모(29)씨는 "임대 보증보험 제도가 있는지도 몰랐다"며 "공인중개사가 근저당에 비해 건물 시세가 높아 경매에 넘어가도 보증금은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하기에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고 후회했다. 수원 전세사기 의혹 주범인 임대인 정모씨 피의자 일가가 소유한 800채 이상 주택 중, 90%가 임대 보증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보증보험 가입이 의무인데도 가입이 안 됐거나, 임대인이 허위 계약서를 제출해 뒤늦게 보증보험 가입이 취소된 사례 등 문제가 심각하다"며 "등록임대사업자 관리를 위해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부터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