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욘 포세, 리듬감 살린 반복된 문장 따라 비운의 예술가 내면으로

입력
2023.10.2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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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멜랑콜리아Ⅰ-Ⅱ' 국내 첫 출간
노르웨이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삶과
화가의 누이를 상상력을 더해 그려낸 작품
간결한 문장의 반복과 의식의 흐름 기법
포세 특유의 형식들, 혼란한 내면 표현해

명작은 무궁한 색을 품는다. 그 안에서 '오늘의' 색을 길어 내는 건 관람자(혹은 독자)의 특권이자 책임이다. 소설 '멜랑콜리아'는 그 역할을 다한 관람자의 기록이다. 현대 노르웨이, 북유럽 문학의 약진을 이끈 거장 욘 포세(64)가 자국의 대표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의 작품에서 찾아낸 건, 우울과 광기 그리고 빛이었다. 전통적인 전기 형식보다는 "헤르테르비그의 그림에서 보았던 어떤 것을 꺼내고자 했다"는 포세의 한 인터뷰처럼, 작가의 상상을 더한 이 소설은 헤르테르비그의 작품과는 또 다른 무진한 색을 품고 있다.

신간 '멜랑콜리아 Ⅰ-Ⅱ'는 욘 포세가 이달 5일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후 한국에 처음 출간된 포세의 작품이라 눈길을 끈다. 각각 1995년, 1996년 노르웨이 뉘노르스크어(노르웨이 공용어지만 자국 내 사용 비중이 10% 수준인 소수언어)로 발표된 '멜랑콜리아Ⅰ', '멜랑콜리아Ⅱ'를 한 권으로 묶은 합판본이다. 현지 출간 당시 노르웨이 순뫼레 문학상, 멜솜 문학상 등을 받았고,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의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위대한 유럽 문학 70대 작품'에 선정된 포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의 작품 중에서는 독특한 위상을 지녔다. 예사로운 일상 속 삶이라는 부조리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범인을 주로 그리던 작가가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멜랑콜리아 Ⅰ'은 독일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 헤르테르비그의 어떤 하루에서 시작한다. 한스 구데 교수가 자신의 그림을 비판할까봐 두려워 수업에 가지 않은 그는 가만히 하숙방에 누워 있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가 현실을 회피하는 동안 걱정거리가 생긴다. 하숙집 주인이 당장 방을 빼라고 통보한 것. 헤르테르비그가 하숙집 딸인 헬레네에게 빠져 사랑을 고백한 게 문제가 됐다. 그는 집주인에게 맞서지도 헬레네를 떠나지도 못한 채 고뇌에 잠긴다.

그때로부터 50여 년 이후인 1902년(헤르테르비그 사망연도)이 배경인 '멜랑콜리아 Ⅱ'는 화가의 누이이자 허구의 인물인 '올리네'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치매에 걸려 죽음을 앞둔 여성의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두 남매의 고통이 포개진다.

가장 특징적인 건 형식이다. 포세는 본질적으로 형태와 내용이 서로 얽혀 있다고 주장하는 작가다. 내용도 본질적으로 양식의 일부라는것. 이 작품에서도 반복적이고 간결한 문장, 의식의 흐름 기법 등 독특한 형식이 내용과 밀착돼 독자를 끌어당긴다. 편집증적 망상과 착란에 시달리는 헤르테르비그와 치매로 인해 혼란을 겪는 올리네의 의식을 따라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진행되는 방식은, 불안과 혼돈을 겪는 인물의 내면에 보다 깊숙하게 들어가게 한다.

되풀이되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면 "나는 한스 구데를 만나기 싫다"라는 문장이 반복되는데, 그사이로 "나는 한스 구데가 내 그림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말을 듣기 싫다" "한스 구데가 내 그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내 귀로 직접 들어야 한다" 등 헤르테르비그의 솔직한 감정을 슬쩍 노출하는 문장들이 배치돼 있다. 인물의 심리에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하게 하는 통로인 셈이다. 간결한 문장의 반복으로 시적 리듬감도 느낄 수 있다. 소설을 한국어로 옮긴 손화수 번역가는 "소리 내어 읽어 보면서 그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감을 느껴 보는 것"을 독자에게 권한다. "문장을 음성으로 발화할 때의 효과, 즉 음악적 성격을 중시하는 저자의 태도"가 충분히 드러난 작품이라서다.

그런 형식을 통해 작가가 집중하는 건 인간 내면이다. 걱정, 불안, 삶과 죽음 등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품고 사는 감정의 심층을 파고든다. "나는 어쩌면 평생 제대로 된 화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며 자기비하와 불안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도 붓을 쉽게 놓을 수 없는 예술가. 오줌을 지린 것도 감각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원초적 수치마저도 깜빡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동생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마는 늙은 여자. 처참한 상태인 두 인물 위로, 포세는 빛을 어렴풋이 그려낸다. 머리를 스치는 갖가지 생각 조각들을 떨쳐 버려야 내면에 고요함이 찾아드는데, 그때 "신의 자비가 내리면 나는 빛 속에 들어설 수 있다"고 두 사람의 아버지가 언젠가 말했던 그 빛을.

진달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