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고 노란색으로 물드는 벚나무 단풍은 봄에 피는 꽃 못지않게 멋지고 아름답다. 그러나 올해엔 보기 어려워졌다. 전국 대부분 벚나무 잎이 가을이 되기 전에 낙엽이 졌기 때문이다. 병충해 때문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지만 여전히 원인과 대책을 두고 분분한 모양이다. 요즘 단풍이 한창인 은행나무도 시원찮다. 잎이 작아진 나무들이 많아졌고, 여름에 열매가 일찍 떨어지는 현상도 많이 보인다. 사계절 거리 풍경을 책임진 이 나무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근래 들어 겨울이 따뜻한 난동(暖冬)현상과 봄철 이상고온과 일시적 저온 등으로 나무 종류나 지역 구분 없이 꽃이 한꺼번에 일찍 피는 동시개화 현상이 걱정이다. 벚꽃은 남쪽부터 피기 시작하고, 단풍은 북쪽부터 물들기 시작한다는 상식마저도 바뀌고 있다. 불규칙한 기상패턴과 방향성을 잃은 기후변화로 식물들이 생활사를 유지하는 데 혼돈을 겪고 있는 것이다.
온대지역 나무는 대부분 봄에 꽃이 피고, 여름에 잎을 전개하여 가을까지 결실과 성장에 필요한 동화산물을 생산하고, 겨울이 되기 전 낙엽과 겨울 동안 휴면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생장한다. 이 같은 식물의 생활사는 온도와 일조량 등 계절 바뀜에 따른 규칙적 환경변화에 맞춰 진행·완성된다. 기상 환경은 해마다 다를 수 있지만 변동 폭이 일정 범위를 유지해야만 생물들이 적응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계절에 따른 환경변화에 적응하여 나타내는 생물들의 반응을 '생물계절'이라 한다. 생태계가 정상으로 유지되려면 때맞춰 꽃 피고 열매를 맺는 생물계절이 규칙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1차 생산자인 식물에 의존하여 생존하는 사람을 포함한 동물에게는 식물의 생물계절이 특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벚나무 잎이 단풍이 들기 전 낙엽이 되거나 은행잎이 작아지는 것이 당장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수 있지만 삶의 질과 직간접적인 경제적 피해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은 커지고 있다. 꽃을 테마로 하는 지역 축제들이 개화 시기를 예측하지 못해 취소되거나 과일값이 몇 배씩 오르고 있는 것은 불규칙한 기후변화와 생물계절로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다양한 피해를 예증하는 일부의 사례일 수 있다.
불리한 환경에 노출된 생물은 단기적으로는 순화와 적응, 장기적으로는 진화라는 나름의 생존기작을 작동한다. 그마저도 적응이 가능한 환경일 때에 한한다. 전 지구적으로 진행 중인 기후변화와 생물계절의 뒤틀림은 이제 삶의 질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한 문제가 되고 있는 데도, 대책에 대한 큰 나라들의 일치된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인류세의 종말은 팬데믹이나 전쟁이 아니라 기후변화로 이미 시작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