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파수꾼' 자처한 어느 금감원 국장의 이중생활... 그는 대출 브로커였다

입력
2023.10.28 16:00
대출 등 알선으로 7,700만 수수
4,500만 이상 현금 수차례 요구
범행 내내 '금감원 국장' 강조
"금감원 내부통제 실패" 지적도

"금융기관에 대한 검사·감독 등으로 건전한 신용질서와 공정한 금융거래 관행을 확립한다."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검사 임무를 맡은 특수법인 금융감독원(금감원)은 홈페이지에 자기 기관의 사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2019년 출간한 '금융감독원 20년사'에서도 "금융소비자 한 분 한 분을 끌어안을 가슴을 지닌 금융 파수꾼"으로 자처하고 있다. 금융기관의 횡포에 당하는 금융소비자에게도 금감원은 정의를 구현해 줄 최후의 보루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런 믿음을 깨는 재판 결과가 최근 서울중앙지법에서 나왔다. 전직 금감원 국장 윤모(64)씨는 현직 시절 지위를 악용해 대출 등을 알선해 준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미 2021년 3월 유사 범죄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확정받은 적도 있었다. 겉으로 자본시장의 파수꾼인 척했지만 실상은 브로커였던 윤씨. 그의 이중생활은 어떻게 이뤄졌던 걸까.

파수꾼 대신 브로커를 택하다

한국은행 초급(고졸) 출신인 윤씨는 1999년 은행·증권·보험감독원 등이 통합된 금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금감원 재직 시절에는 저축은행 등 비은행 분야 검사국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그러나 2012년 금감원 국장급인 직책에서 보직해임 된 이후엔 무보직 상태였다고 한다.

그가 국장급 보직에서 쫓겨난 이유는 일탈 때문이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2020년 국정감사 당시 금감원으로부터 확보한 징계 내역에 따르면 윤씨는 2012년 1월과 3월 과다채무·저신용 상태였는데도 금감원 간부 직위를 악용해 캐피털 회사에서 2억 원을 최저금리(고정 7.99%)로, 같은 해 7월에는 시중은행에서 4,000만 원을 우대금리(6.02%)로 대출받았다. 윤씨는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등 내부 감찰까지 방해했지만, 금감원은 2013년 5월 감봉 징계만 내렸다.

처벌이 약했던 탓일까. 윤씨는 징계 이후 금감원 간부로서의 힘을 대출 브로커 활동에 써먹었다. 그는 2018년 7월 제조업체 대표로부터 5억 500만 원을 대출받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알고 지내던 시중은행 부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행은 2달 뒤 대표에게 5억 500만 원 대출을 내줬고, 윤씨는 사례금으로 1,000만 원을 받았다.

윤씨는 다른 대출 브로커와도 합심했다. 2019년 3월 브로커가 소개해준 건설업체 대표가 최대 5억 원을 대출받게 해주는 대신 대출금의 10%를 수수하기로 약정한 것이다. 윤씨는 저축은행 두 곳에 방문하거나 전화를 걸어 '금감원 간부'라는 사실을 밝힌 뒤 "대표가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금융권 관계자들도 윤씨의 힘을 빌리려 했다. 지역농협 상임이사가 2014년 2월 윤씨에게 "대출한도 초과 등을 저지른 임·직원 8명의 징계 수위를 낮출 수 있게 해달라"며 2,000만 원을 보낸 것이다.

검찰은 2019년 11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수재 혐의를 적용해 윤씨를 재판에 넘겼다. 윤씨는 2020년 7월 1심에서 징역 2년 2개월에 집행유예 4년과 벌금 6,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때만 해도 윤씨 사건은 다른 재판들처럼 주목을 받지 않은 채로 끝날 듯했다.

옵티머스 사태로 여죄 드러나

윤씨는 2020년 10월 갑자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발단은 '옵티머스자산운용(옵티머스) 사태'였다. 옵티머스 사태는 김재현 전 옵티머스 대표 등이 2017~2020년 투자자 3,200여 명을 속여 받아낸 투자금 1조3,500여억 원으로 부실채권 인수와 펀드 돌려막기 등에 사용한 사건이다. 김 전 대표 등이 투자자들에게 돌려주지 못한 피해 금액만 금감원 추산 5,500여억 원에 달한다.

윤씨는 옵티머스와 금융권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맡았다. 검찰 조사 결과 그는 2018년 4월 김 전 대표 등으로부터 2,000만 원을 받고 시중은행 관계자들에게 옵티머스가 출시한 펀드 가입을 제안했다. 윤씨는 윤모 당시 옵티머스 이사에게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안다"며 "펀드에 가입할 투자회사뿐만 아니라, 펀드 판매사 유치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죄도 드러났다. 그는 같은 해 7월 보험사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지인 아파트 강제경매 신청 취하를 알선했다. 같은 해 11월 증권사 간부에게 연락해 오피스텔 리모델링 사업을 하는 부동산 회사가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2019년 1월에는 블록체인 업체 측의 부탁을 받고 시중은행 간부를 찾아 투자를 고려해달라고 했다. 윤씨가 브로커 노릇을 하고 받은 돈은 2,700만 원에 달했다. 2018년 하반기에는 지인의 부동산 담보 대출과 호텔 인수 자금 대출 등을 알선하면서 4,500만 원을 요구한 것으로 조사됐다.

"내가 금융감독원 국장인데." 윤씨는 늘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켰다. 금융기관 관계자들은 검찰 조사 등에서 윤씨와 사적인 친분이 없었지만 금감원 국장이라는 사실 때문에 각종 요구에 협조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검찰은 2021년 1월 특정경제범죄처벌법상 수재 혐의를 적용해 윤씨를 추가 기소했다.

결국 실형에 법정구속

징계 무마 청탁 등 먼저 재판에 넘겨진 사건은 2021년 3월 대법원에서 마무리됐다. 최종 형량은 1심(징역 2년 2개월에 집행유예 4년과 벌금 6,000만 원)과 같았다. 윤씨가 이 재판에선 혐의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윤씨는 그러나 추가 기소된 '옵티머스 뒷돈' 등 재판에서 돌연 무죄를 주장했다. 윤씨 측은 "공소사실에 해당하는 기간(2018년 3월부터 2019년 2월)에는 대학 겸임교수로 파견 근무를 나와 있었기 때문에 금감원 직원이라는 신분을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돈을 빌렸거나 빌리려 했던 것뿐 알선 대가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조병구)는 지난달 16일 윤씨에게 징역 1년 9개월과 벌금 3,000만 원을 선고했다. 추징금 4,700만 원 납부도 명령했다. 재판부는 "윤씨는 금융기관 임·직원의 직무 집행의 공정성 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저해했다"며 "사회적 해악이 큰데도 진지하게 반성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며 윤씨를 법정 구속했다.

재판부는 윤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융기관 간부들이 법정에 나와 입을 모아 "지위 때문에 부담을 느꼈다"고 증언한 게 결정적이었다. 한 증권사 본부장은 법정에서 "윤씨가 김 전 대표를 소개해준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게 아닌가 염려돼 부담스러웠지만 (금감원 국장이기에) 거부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금융회사 임·직원들은 금감원 국장이라는 지위로 업무에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돈을 빌렸거나 빌리려 했다"는 윤씨 주장도 기각됐다. 재판부는 "윤씨는 자신에게 청탁을 한 사람들과는 사적 친분이 없었다"며 "이자나 담보 없이 돈을 대여해줄 만큼 신뢰관계가 형성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빌린 돈이라면 "돈을 돌려 달라"는 취지의 소송을 당했을 텐데, 윤씨가 피소된 적이 없는 점도 고려됐다.

"금감원 내부통제 실패 사례"

윤씨는 2019년 6월 정년퇴임했다. 범죄행각 대부분이 퇴임 1년 전에 몰렸는데도 금감원은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고, 윤씨를 교단으로 내보내기까지 했다. 2020년 국정감사에서 "금융권 내부통제를 강조하는 금감원이 정작 자기 조직의 통제에 실패한 셈"(윤창현 의원)이라는 지적이 나왔던 이유다.

실형 선고와 법정 구속에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굳은 채로 흐느끼다 구치소로 끌려간 윤씨. 이번 판결과 1심 형량이 2025년 3월 내로 확정되면 윤씨는 3년 11개월 동안 옥살이를 해야 한다. 집행유예 기간 중에 새로운 형이 확정되면, 기존에 받은 징역형도 집행되기 때문이다. 검찰과 윤씨는 항소했다.

박준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