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고문’ 된 태아 산재 인정법, 부모들은 878일째 기다린다

입력
2023.10.16 04:30
1면
2021년 ‘부모 업무환경 탓 자녀 건강 손상은 산재’ 인정법 통과
현재까지 법 적용된 사례는 '0'건, 최대 878일째 기다려
근로복지공단 '역학조사 장기화' 고용부 '까다로운 기준' 탓
부모들 '고통 경제적 부담' 시달리고, 남성 부모는 신청도 못해
전문가 "역학조사 간소화, 치료비 선보장 필요"

2021년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태아 산업재해 인정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은 하나의 이정표였다. 임신 중인 근로자가 위험한 환경에 노출돼 자녀가 선천성 질병을 가지고 태어날 경우 산재 보험으로 ‘국가가 보호하겠다'고 선언한 순간이었다. 자녀에게 대물림된 직업병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던 부모들은 국회의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법안이 마련된 후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에서 태아 산재를 인정한 경우는 0건. 기나긴 역학조사, 까다로운 인정 요건 탓에 태아 산재법은 ‘희망고문법’과 다름없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일보는 태아 산재를 신청한 부모, 전문가들을 만나 제도의 문제점을 짚어 봤다.

878일, 기약 없는 기다림

2021년 5월 태아 산재를 신청한 정은미(가명ㆍ51)씨는 15일로 878일째 공단의 답변을 기다린다. 그는 임신 11주째인 1999년 8월까지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했다. 별다른 보호장비 없이 반도체를 까맣게 칠하는 몰딩 작업을 했다. 태아에게 치명적인 벤젠, 아세트알데히드, 전리방사선 등에 노출된 건 뒤늦게 알았다.

이듬해 낳은 아이는 선천성거대결장증을 앓았다. 장운동을 못해 배가 부풀어 오르는 희귀병. 아이는 한 살 때 대장을 모두 잘라냈고, 평생 배변 조절을 못한다. 정씨 역시 회사를 나온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아팠다. 갑상선암, 뇌전증(간질), 류마티스 관절염, 자궁경부 이형성증(종양) 등으로 고통받았다.

태아 산재 가능성은 크다.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의 소견서(업무관련성평가서)를 보면 “산모가 일했던 몰드 공정의 유해인자는 태아 발달에 이상을 초래한다고 (의학계에) 보고됐다”며 “몰드 공정 업무로 (자녀에게) 질병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했다.

최근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정씨는 “내가 아픈 것보다 평생 병을 안고 살아갈 아이에게 미안하다”면서 “산재가 인정돼 아이에게 ‘사회가 너를 보호하고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내 잘못 때문에 아이가 아픈 게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 싶다”고도 했다. 태아 산재가 적용되면 자녀는 요양급여(치료비), 장해급여, 직업재활급여 등을 받을 수 있다.



역학조사 180일 마무리해야 하지만

그러나 간절한 희망이 언제 이뤄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씨를 돕고 있는 시민단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전문가 심의 등 남은 산재 절차들을 고려하면 정씨의 산재 판정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산재 인정 절차가 길어지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질병과 업무의 관련성을 확인하는 역학조사부터 오래 걸린다. 원칙상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180일 내’에 역학조사를 심의ㆍ의결해야 하지만 내부 지침이라 강제성이 없다. 정은미씨는 산재를 신청한 지 791일 만에 역학조사를 받았다.

태아 산재가 인정될지도 장담할 수 없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태아 산재법 시행령’을 만들면서 ‘태아에게 영향을 주는 유해인자’를 17개로 한정했다. 이는 태아에게 위험하다고 알려진 화학물질 1,484개의 1% 수준이다. “태아 산재법을 무력화했다”는 비판이 나오자 고용부는 “유해인자 폭을 넓히겠다”고 했지만 후속 조치는 아직 없다.

이현주 우송대 간호학과 교수는 “고용부가 유해인자를 너무 협소하게 규정해, 유해인자가 아닌 원인으로 발생한 2세 질병은 산재 인정이 까다로워졌다”며 “희귀병이 많은 태아 산재에는 역학조사를 간소화할 수 있도록 유해인자 폭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경제적 고통 짊어진 부모들

산재 인정을 기다리는 동안 부모가 겪는 정신적ㆍ경제적 고통은 헤아릴 수 없다. 김현정(가명ㆍ46)씨는 임신 4개월째 산부인과 초음파 검사 때 “아이에게 콩팥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2004년 9월생인 아이는 콩팥무신장증, 방광요관역류증, IgA신증(혈뇨를 보는 병)을 앓았다. 김씨는 출산 직전까지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일을 했다.

아이는 여러 번 수술대에 올랐다. 방광 역류 수술, 신장 개복 검사, 편도 절제 수술 등을 받았다. 오른쪽 콩팥도 10%만 기능해 평생 치료가 필요하다. 김씨는 한국일보에 “의료보험이 안 되는 약을 썼을 때는 약값만 월 200만 원이 들었다”며 “그래도 어려운 치료를 견뎌줘 아이에게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다.

이들 가족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산재보험 선보장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해 왔다. 의사의 판단으로 치료비를 지급하고, 이후 산재 여부를 확정하는 제도다. 예방의학 전문의인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은 “시간은 산재 피해자의 편이 아니다”라며 “산재 피해자들이 더 나은 여건에서 치료를 받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산재 선보장 제도를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유해물질 노출 여성 10만명

2019년에 나온 고용부 연구용역 보고서는 유해물질을 다루는 여성 노동자를 10만6,669명으로 추산했다. 태아에게 치명적인 '생식독성' 물질을 취급하는 40세 이하 여성노동자도 3,929명이나 됐다. 하지만 현재까지 공단에 접수된 태아 산재는 10건에 그친다. 공단이 태아 산재를 승인한 사례도 4건뿐이다. 이는 대법원이 2020년 ‘태아 산재를 인정한다’고 판결한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이다. 간호사들이 유독한 약품을 다루다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한 ‘제주의료원 사건’은 태아 산재 문제가 공론화된 계기다. 바꿔 말하면 공단이 태아 산재법 제정 후 산재를 승인한 사례가 없다는 얘기다.

오히려 기업이 태아 산재 보상에 열려 있다. 노동계에 따르면 삼성ㆍSK하이닉스ㆍLG디스플레이 등은 회사 노동자의 ‘자녀 질환’에 보상하는 제도를 운영한다. 삼성은 2020년 기준으로 자녀 질환 신청자 26명에게 보상을 완료했다. 이종란 노무사는 “전체 산업계로 확대하면 아픈 자녀를 가진 부모는 훨씬 많을 것”이라며 “공단이 산재 인정을 까다롭게 하기 때문에 아이 치료와 생계 유지에 허덕이는 부모들이 산재 신청을 주저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태아 산재 인정 범위를 ‘아버지’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행법은 태아 산재 적용 대상을 ‘임신 중인 노동자’(여성)로 한정했다. 삼성 디스플레이에서 일한 최승현(가명ㆍ41)씨는 아버지라는 이유로 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경우다. 시민단체 반올림에 따르면 최씨의 아이는 2008년 시신경 결손, 난청, 심장결함 등을 앓는 차지증후군을 안고 태어났다. 최씨가 설비를 정비할 때 사용한 화학물질(IPA)이 자녀에게 영향을 줬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명희 위원장은 “정자 단계에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독성 물질에 노출되면 결함을 가진 정자가 수정된다”며 “태아 산재에 ‘아버지 요인’을 포함하는 게 타당하다”고 했다.

정지용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