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선택권’ 성역 침범한 공화당… ‘임신중지 범죄화’ 후폭풍, 미국 대선 흔들까

입력
2023.10.16 04:30
14면
<1> 공백 2년차, 선거 쟁점화한 임신중지권
금지州서 의사 엑소더스… 여성 건강권 위협
유권자 불만 비등… 민주, ‘불안 마케팅’ 주력
‘자유주의’ 전통 강한 미국, 규제에 거부 반응


편집자주

‘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


9·11 테러 22주기 희생자 추모식이 미국 각지에서 열린 지난달 11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기억과 통합을 호소하며 비장함을 불러일으켰던 이날, 수도 워싱턴 포토맥 강변에 위치한 조지타운대 캠퍼스 내 학생 운동 중심지인 ‘붉은 광장’에는 학생들에게 피임기구(콘돔)를 나눠 주는 테이블이 차려졌다. 학생 단체인 ‘선택을 위한 히야스(H*yas for Choice·HFC)’는 비가 오지 않는 한, 매일 이곳을 지킨다.

여전히 종교와 세속이 대립하며 공존하는 미국 사회의 축소판 풍경이다. 가톨릭 학교인 조지타운대 안에서는 원칙적으로 콘돔 배포가 금지된다. 다만 학교 지원을 받는 공식 조직에 한해서다. HFC가 운영비를 온전히 기부금에 의존하는 이유다. 이 단체는 ‘선택을 옹호하고(pro-choice) 성(性)을 긍정하는 생식 정의(正義) 그룹’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아이를 가질 권리뿐 아니라 갖지 않을 권리도 지지한다.

선택할 수 없다고?

자유분방한 개인을 엄숙한 종교가 돕기는 힘들다. 그러나 제약하기도 어렵다. “우리가 하는 일이 가톨릭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학교가 결론 내렸지만, ‘모든 사람을 돌보라’는 학교 설립 이념은 오히려 생식 정의를 적극 실천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고 단체가 주장하는 배경이다. 상호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암묵적 신사 협정이 작동한다. 조지타운대 트레이드마크인 ‘호야(Hoya)’를 쓰지 못해 이름에 영문자 ‘o’ 대신 넣은 별표(*)는 불화의 인정이자 긍정이다.

1991년부터 30여 년째 해 오고 있는 일이지만 지난해 여름부터는 사명감이 더 커졌다. 임신중지(낙태)를 헌법적 권리로 보장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 작년 6월 연방대법원이 49년 만에 폐기했기 때문이다. 권리의 존폐 결정이 각 주(州)에 맡겨지면서, 거주 지역에 따라 임신이 자칫 범죄(임신중지 행위 또는 시술)로 이어질 수도 있게 됐다. 원치 않은 임신은 이제 재앙이다. 내털리 프라이스퍼지 HFC 홍보국장은 “콘돔 필요성이 더 커진 것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생명이냐 선택이냐, 하나만 고르라고? 이상한 요구다. 하지만 임신중지라는 특정 조건에서 상생 가능해 보이던 두 가치는 극적으로 길항한다. 당사자(가임기 여성) 입장은 대세가 갈린 듯하다. 여대생에게 물었다. 조지타운대에서 만난 니아는 “국가가 마땅히 존중해야 할 개인의 선택권을 도리어 법으로 제한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며 “나는 ‘프로 초이스’(선택 옹호)”라고 말했다. 조지워싱턴대 학생 제시도 “주변에서 (임신중지권을 부정하는) ‘프로 라이프’(pro-life·생명 옹호)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차피 풍선처럼

지난달 7일 딕 더빈 민주당 연방 상원의원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임신중지 금지는 임신중지를 끝내지 못한다”고 썼다. 그는 “마땅히 건강권과 여러 지원을 누려야 할 여성에게 더 큰 희생과 위험 감수를 강요할 뿐”이라고 했다.

근거는 당일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인용 보도한 임신중지권 옹호단체 구트마허연구소의 조사 결과였다. 연구소는 의료기관 설문을 토대로 올 상반기 임신중지가 허용되는 36개주와 수도 워싱턴에서 총 51만1,000건의 임신중지가 이뤄진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 전역에서 임신중지가 합법이던 2020년 상반기(46만5,000건)보다도 4만6,000건 많은 수치다. 주별로 임신중지 금지가 부활했음에도 오히려 더 늘어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접근성 향상이다. 원격 진료로 임신중지약을 확보하기가 갈수록 수월하다. 또 하나는 풍선 효과다. 임신중지 제한을 피해 주 경계를 넘는 이동이 일어났다. 규제가 강한 주가 주변에 있을 때 증가 현상이 두드러졌다. 위스콘신, 인디애나, 켄터키, 미주리 등 임신중지 억제 강도가 높은 주들에 둘러싸인 일리노이주가 대표적이다. 3년 새 2만6,000건에서 4만5,000건으로 급증했다.

수도 워싱턴도 사정이 비슷하다. 임신중지권 옹호단체인 가족계획협회(SFP) 주도로 결성된 ‘위카운트’ 집계에 따르면, 워싱턴은 작년 4월부터 1년간 미국에서 합법적 임신중지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임신중지가 필요한 이에게 비용을 대는 비영리단체 ‘계획된 부모 되기 수도 워싱턴 지부(PPMW)’의 홍보 담당자 다이너 위닉은 한국일보에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 후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텍사스, 루이지애나 등 수백 마일 떨어진 주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떠나는 이는 수요자만이 아니다. 임신중지 공급자인 의사도 범죄자가 되기 싫은 건 마찬가지다. 지난달 NYT는 아이다호주의 산부인과 의사 공동화 현상을 소개하며 이 지역 임신부들 건강이 위기에 처했다고 짚었다. 살인 사건 피의자처럼 의료 행위가 정당방위임을 소명해야 하는 현실에 자괴감이 든다는 게 의사들 토로다.

다른 선진국보다 산모 사망률이 높은 미국 입장에서 임신중지 불법화는 설상가상이다. 로라 마이어스 PPMW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임신중지 금지에 따른 기소 가능성이 의사를 위축시켜 치료를 지연시킬 수 있는 데다, 임신부 건강과 밀접한 임신중지나 유산 관리 관련 의학 교육의 부실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임신부 건강과 연관된 판단을 정치인들이 한다는 게 어불성설”이라며 “임신부 자신과 의사에게 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풍낙엽 공화당

권리 박탈의 피해자가 확실하고 체감도도 높다 보니 여성이 느끼는 당혹감은 연령을 막론한다. 위스콘신주에 사는 53세 여성 수전 린드너는 15년 전 믿었던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워싱턴포스트(WP)에 “(원치 않는 임신으로) 처벌받는 쪽은 결국 여성”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10일 워싱턴 지역축제에서 만난 여성유권자연맹(LWV) 활동가는 “버지니아는 (보수적인) 남부권에서 유일하게 아직 임신중지권이 합법인 주”라며 “11월 주의회 선거가 중요하다”고 했다.

‘선거의 나라’ 미국에서 여론은 선거로 표출된다. 로 대 웨이드 판례의 효력 상실에 따른 공백기가 2년 차에 접어들면서 임신중지권은 각급 선거의 핵심 쟁점이 됐다. 다음 달 버지니아 주의회 선거도 마찬가지다. 글렌 영킨 주지사는 상·하원 석권을 노린다. 그는 보수 성향 야당 공화당의 유망한 차기 지도자다. 출마 의사도 피력하지 않았는데, 당내 유력 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경선 대항마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많다.

하지만 그에게도 임신중지는 까다로운 이슈다. 작년 11월 ‘집권당의 무덤’인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신승한 것도 임신중지 불허 정책의 역풍을 맞았기 때문이다. 자충수 여파는 이어졌다. 공화당은 연전연패했다. 대선 경합주인 위스콘신의 올해 4월 대법관 선거에서 임신중지 반대 단체의 지지를 받던 후보가 낙선했고, 8월에는 공화당이 장악한 오하이오 주의회가 개헌 문턱을 높여 임신중지 금지를 유지하려다 주민투표에서 막혔다. “임신중지 접근이 위협당하자 오하이오 같은 보수 거점에서도 비정상적으로 높은 투표율이 기록됐다”는 게 WP 분석이었다.

‘태아 죽이기’라는 정면 승부는 공화당에 버겁다. 줄곧 윤리적 낙인을 찍으려 애써 왔지만 먹히지 않았다. 상식과도 멀었다. 2020년 기준 임신 20주 이후 임신중지가 이뤄지는 경우는 1% 미만이라는 게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집계다. 사실상 임신중지 제한이 없는 뉴저지에서도 비율이 2%를 밑돈다.

민주당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성 유권자 대상 ‘불안 마케팅’에 주력한다는 전략이다. 공화당의 선거 승리가 거듭될 경우 임신중지 금지 입법이 연방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최대한 홍보하는 것이다.

선택을 위한 선택

공화당이 수세에 몰린 건 ‘개인 선택권’이라는 미국의 성역을 침범한 탓이다. 미국의 보혁 관계는 유럽과 다르다. 보수의 반대편이 진보나 평등이 아니라, 여전히 자유다. 공동체주의보다 개인주의 전통이 강하다. 2019년 민주당 정치활동위원회(PAC·정치자금 조달 창구) ‘아무도 낙오하지 않는 민주당(No Dem Left Behind)’을 설립한 하산 마티니는 로이터통신에 “임신중지권은 자유에 관한 것”이라며 “그 원칙을 토대로 미국이 수립됐다”고 말했다.

성에 개방적인 만큼 미국 여성은 자기 결정권과 건강권에 민감하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여성주의나 생명보다는, 선택권과 더 단단히 묶인 문제다. 전통적 자유주의를 소환한 것은 우경화에 편승한 공화당의 오만일 수 있다. 은퇴한 제강소 노동자 빌 크루거(79)는 WP에 아이를 낳다 여자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임신중지권 상실에서 현대 미국인 여성은 이런 시대착오적 가부장제 신권(神權) 사회로의 퇴행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이다.

주유엔 미국 대사 출신 공화당 대선 주자 니키 헤일리, 버지니아 의회 선거를 준비하는 영킨 주지사가 15주 이후 임신중지 금지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절충적 선택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임신중지권이 성역이 아니듯 임신중지 금지도 성역이 아니니,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는 유보적 입장이다. 임신중지 이슈에 관한 한 열세를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고 임신중지 쟁점에만 의존하는 게 내년 대선을 준비하는 민주당에 바람직한 길이라 보기도 어렵다. 원래 자유가 공화당이 우위를 보여 온 가치인 데다, 정치 냉소주의가 공화당에만 작용하는 건 아니어서다. 조지워싱턴대 학생 제시는 “민주당에도 기대감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것도 결과적으로 민주당 대통령 때인 거잖아요.”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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