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반으로 쪼개진 동남아

입력
2023.10.11 20:30
13면
싱가포르, 필리핀 하마스 겨냥 "강력 규탄"
'이슬람 형제' 말레이·인니는 "이스라엘 탓"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 여파가 동남아시아까지 뒤흔들고 있다. 전쟁 책임을 놓고 이슬람 국가와 다른 국가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탓에 반 세기 넘게 똘똘 뭉쳐 한목소리를 내온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이 반으로 쪼개졌다.

11일(현지시간) 아세안 각국 언론을 종합하면 동남아 국가 중 하마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유일한 나라는 싱가포르다. 싱가포르 외교부는 7일 하마스의 기습공격 발생 직후 “무고한 민간인 사망을 초래한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빌라하리 카우시칸 전 외무부 차관 등 일부 정치권 인사는 “하마스와 대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비판했다.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건국 초 이스라엘 도움으로 군대를 건설했고, 이스라엘제 무인 정찰기 등 다수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과 외교·군사적으로 밀착한 필리핀도 하마스 비판에 합류했다. 필리핀은 대통령실 명의 성명을 통해 “필리핀은 민간인 공격을 규탄한다. 정부는 유엔 헌장에 명시된 개별 국가의 자위권을 이해한다”고 발표했다. 하마스를 거명하진 않으면서도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이 정당하다고 손을 들어준 셈이다. 하마스의 공격으로 필리핀인 7명이 이스라엘에서 실종됐다.

무슬림 인구가 다수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형제국’ 팔레스타인 지지를 표명했다. 말레이시아 외무부는 8일 양측의 긴장 완화를 촉구하면서도 “분쟁의 근본 원인은 장기간에 걸친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 영토) 불법 점령과 봉쇄, 이스라엘의 알아크사(이슬람 성지) 모독과 강탈 정책 때문”이라고 책임을 이스라엘로 돌렸다.

인도네시아 외무부 역시 “갈등의 근원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은 유엔이 합의한 기준에 따라 해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두 나라의 무슬림 단체들은 “팔레스타인 전사들에게 연대 서한을 보내야 한다”며 이슬람권 최대 국제기구인 ‘이슬람협력기구(OIC)’를 압박하고 있다.

다른 아세안 국가들은 “평화적 수단을 통해 의견 차이를 해결하라”며 일단 중립을 유지했다. 다만 태국은 국민 20명이 사망했고 베트남은 이스라엘의 세 번째로 큰 무기 수출 시장이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지면 입장을 밝힐 수밖에 없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아세안 존립 기반인 단결성이 도전받게 됐다는 우려도 커진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가뜩이나 약해진 아세안의 단합이 더욱 깎여 나가는 모양새”라고 전했다. 아세안 10개국은 인종, 종교, 국토 규모, 소득 수준, 정치 시스템 등이 모두 다르지만 ‘다양성 속의 조화’라는 기치 아래 56년간 한목소리를 냈다.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 발발 이후 대응 방법을 두고 국가 간 의견이 엇갈리면서 잡음이 이어졌는데, 여기에 종교적 정체성까지 복잡하게 얽히면서 균열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