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간 2,123명. 올해 6월 경기 수원시 냉장고에서 숨진 채 발견된 2명의 영아는 세상이 지금껏 놓친 아이들(출생 미신고 아동)의 적나라한 현실을 들춰냈다.
여론은 즉각 갈렸다. 한쪽엔 "핏덩이를 버린 매정한 부모"라 욕하는 손가락질이, 반대편엔 "오죽 힘들면 그랬겠느냐"는 동정이 공존했다. 불붙는 여론에 놀란 정부와 국회는 부랴부랴 의료기관에 출생통보 의무를 부과하고, 친생모의 익명 출산을 보장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지방자치단체도 앞다퉈 위기 임산부 지원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런 '어른들의 서사'엔 정작 아이들의 생(生)이 낄 틈은 없었다. 여름의 그 뜨겁던 여론이 훑고 지나간 '영아 유기 현장'엔, 여전히 시설 관계자들의 헌신과 지자체 담당 공무원들의 수고가 법령의 빈틈을 채우고 있을 뿐. 베이비박스엔 지금도 끝내 키우지 못한 핏덩이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한국일보는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에 맡겨졌다가 양육시설로 간 아이, 사랑이(가명)가 보금자리를 찾고 이름을 얻어가는 과정을 함께 지켜봤다.
#9월 5일 오전 9시 10분 관악구청
스타렉스에 올라탄 관악구청 3년 차 아동보호 전담요원의 하루가 시작됐다. 베이비박스 아동이 시설에 입소하기 위해선 주사랑공동체(베이비박스 운영주체)가 경찰에 유기아동 발생 신고를 하는 데서 절차가 시작된다. 구청 요원들도 현장에 나가 인도 절차를 밟아야 하기에, 사랑이를 직접 데리러 나가는 길이다.
사랑이는 7월 중순 이후 한 달 반 만에 베이비박스에서 시설로 보내지는 아이다. 그사이 6명의 갓난아이들이 베이비박스에 들어왔지만, 부모들이 교회 측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면서 유일하게 사랑이만이 구청 인계가 결정됐다. 세상에 나온 지 나흘 만에 사랑이는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베이비박스에서 사랑이 곁에 남은 건 이름 석 자와 짧은 편지, 엄마의 간단한 상담 기록이 전부였다. 구조에 동행한 또 다른 보호요원은 "익명 출산을 원하는 부모들이 베이비박스를 찾기 때문에 아이 정보를 거의 알지 못한 채 구조한다는 부담도 크다"고 말했다.
#오전 9시 25분 난우파출소
다행히 이날 새벽 신고를 받은 난우파출소는 보호요원들이 찾아오기 전 사랑이 관련 조사를 마무리한 상태였다. 주사랑공동체 직원들로부터 아이를 발견한 경위를 파악한 경찰은 △피구호자 인계서 △영아 유기 발견 통보서 △진술서 등을 이미 마련해 두고 있었다. 경찰은 나중에 혹시나, 친부모가 사랑이를 찾을 때를 대비해 유전자정보(DNA)도 채취해 뒀다.
#오전 9시 35분 주사랑공동체
파출소에서 주사랑공동체까지는 10분 거리. 구청 스타렉스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랑이가 강보에 싸인 채 보호요원 품으로 건네졌다. 분유, 수유쿠션, 노리개젖꼭지 등 사랑이가 사용할 물건들을 담아 둔 꾸러미와 함께였다.
육안상 건강 이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젖병을 잘 못 빤다"는 교회 직원의 설명에 잠시 긴장감이 돌았다. 신생아에게 수유량 부족은 탈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여서다. 사랑이를 안은 보호요원은 "무뇌증이나 유아매독 등 증상 없는 질환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어 안심하긴 이르다"고 말했다.
#오전 10시 25분 서울시립어린이병원
그래서 유기 영아 구조에서 필수 절차가 건강검진이다. 아이가 전염성 병을 앓고 있진 않은지, 장애는 없는지, 발육 상태는 양호한지 꼼꼼히 진료한 후 문제가 없어야만 당일 시설 인계가 가능하다. 보호요원은 "열 중 세 명꼴로 입원치료가 필요한데, 황달이나 저체중이 가장 흔한 편"이라고 설명했다.
약 한 시간에 걸쳐 이뤄지는 검진 과정에서 아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순간은 단연 채혈이다. 먹은 것이 적어 체내 수분이 부족했던 사랑이는 혈관이 잘 잡히지 않아 몸 곳곳에 바늘을 꽂아야 했다. 30분의 사투 동안 보호요원들은 먹은 걸 게워내는 사랑이를 달래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후 1시 42분 서울시아동복지센터
결과는 2시간 뒤 나왔다. 황달 수치가 높긴 하지만, 다행히 입원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동안 교대로 사랑이를 돌보며 촉박한 점심을 해결한 보호요원들은 서둘러 강남구 서울시아동복지센터로 향했다.
복지센터에서 사랑이가 머무는 기간은 약 2주다. 양육시설 입소 여부를 결정하는 구청의 사례결정위원회(사결위)가 마무리되기 전까지다. 복지센터 관계자는 "아직 법적으로 성명이 없는 상태기 때문에 사랑이는 이름 옆에 '미상'이 적히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 구청, 이제 사랑이 이름을 만들 차례
사랑이를 복지센터에 인도한 관악구청은 사랑이의 성본창설 작업에 들어갔다. 유기 영아의 성은 관악구청장(박준희)의 것을 따고, 본은 '한양'으로 하는 게 관례다. 사랑이는 한양 박씨, 박사랑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본창설 완료까지 약 한 달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사이 사결위가 마무리되고, 시설로 보내진 아동의 출생신고는 시설장이 후견인 자격으로 하게 된다.
유기 영아 보금자리를 찾는 일은 베이비박스, 구청, 어린이병원, 시설을 오가야 하는 복잡한 절차다. 그래서 관악구청 아동보호팀의 업무는 항상 포화 상태다. 전국 지자체 중 사실상 유일한 베이비박스 소재지이면서 보호요원 5명 중 유기아동만 전담하는 공무원은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구조를 나가는 날엔 다른 업무에 제동이 걸린다. 구청 관계자는 "1명당 기존에 맡고 있는 보호아동 수도 타 자치구에 비해 많은 편인데 서울시가 최근 '상시 구조' 지침을 세우면서 부담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건강검진에서 아이의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판정되는 경우, 병동과 간병인을 구하는 것 역시 현장 직원들 몫이다. 베이비박스 업무에 잔뼈가 굵은 한 보호요원은 "어린이병원에선 중증질환 치료가 여의치 않은 경우가 있어 진료 후 보라매병원이나 타 병원을 일일이 알아봐야 할 수도 있다"면서 "간병인 비용도 구청 자체적으로 확보한 재단 후원 등으로 해결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실 가장 큰 걱정은 이렇게 구조된 아이들의 미래다. 베이비박스 아동의 시설 입소 후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동보호 전담요원들이기에, 이들은 정치권과 사회가 유기 아동들에 대한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보호요원은 "아이들 사정을 생각하면 구조 과정에서도 일부러 정을 붙이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아동 지원 확대와 유기 방지가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