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붙한 듯한 '한옥' 1,000채... 원래는 일제 군수공장 숙소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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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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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처럼 틀로 찍어 만든 듯 같은 모양으로 남쪽을 향해 열린 ‘ㄷ’자 기와지붕이 끝없이 늘어져 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게 만드는 똑같은 집’이라는 비아냥거림은 흔히 근현대식 아파트를 조롱할 때 쓰이지만 2층짜리 건물조차 드문 이곳은 아파트 단지와는 거리가 멀다. 철근콘크리트 대신 황토로 벽을, 아스팔트 대신 기와로 지붕을 올린 한옥이 반듯한 격자형 도로를 따라 나열된 이곳은 준공 80년 만에 소임을 다하고 헐리는 한반도 1세대 공공임대주택 ‘영단주택’ 단지다.

단독주택은 같은 시기에 같은 자재로 지었더라도 전체 구조까지 같은 경우는 드문데, 인천 부평구 산곡동 산곡초등학교 일대에는 같은 구조로 지어진 집이 수백 채나 있다. 하늘에서 보면 이 사실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비슷한 지붕을 덮은 수준이 아니라, 14~16가구씩 아예 한 지붕으로 엮여 있다. 각 가구의 생활양상에 맞춰 조금씩 개축되었지만 본래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지상으로 내려와 골목 사이사이를 걸어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색과 자재로 벽을 둘렀지만 일직선으로 뻗은 골목 양 옆 대칭으로 늘어선 대문의 모습에 이곳이 자연스레 생긴 마을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일제 말기 직면한 도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본토와 식민지에 ‘주택영단’이라는 공기업을 설립하고 규격화된 주택을 대량 공급하는데, 이곳도 ‘조선주택영단’이 운영한 단지 중 하나다.





조선주택영단(이하 조선영단)은 ‘노무자 기타 서민의 주택의 공급’을 단령 1조에 공식적인 목적으로 명시했지만 일제 말기 전황이 악화되자 한반도 병참기지화에 매진했다. 일반 도시 노동자를 위한 주택 보급이 아닌 군수공장 노동자 수용 시설 건설이 중점 사업이 됐다. 산곡동 영단주택 역시 당시 한반도 최대의 군수공장인 일본육군조병창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 계획됐고, 공식적으로 그런 명칭이 붙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지 주민들이 이를 ‘사택’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모로부터 당시 생활을 전해 들었다는 최승복(70)씨는 ‘긴 골목 덕분에 군 점호하듯 주민들을 한 번에 불러내 볼 수 있었다’고도 한다.

실질적으로 ‘도시 주택’이 아닌 ‘군 사택’이었기에 일본 본토 영단주택 건설 시 적용됐던 ‘건폐율 33% 미만’ 등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주택 면적도 본토의 가장 작은 평형인 8평보다 좁은 6평이다. 일반 가정 주택보다 더 열악한 ‘합숙소’는 5평 남짓한 방에 6명이 거주하도록 설계됐다. 실제로는 설계 수용 인원의 두 배에 가까운 인원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광복 이후 임대인이자 관리인인 조선영단이 대한주택영단, 대한주택공사(현 LH)로 개편되며 영단주택도 여타 적산 가옥처럼 민간에 매각됐다. 주로 당시 실거주하던 주민에게 분양됐는데, 불법 증축으로 점유한 대지도 지대를 계산해 매각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공공임대주택이 아니게 된 이후에는 집주인이 직접 거주하거나 세를 놓은 방에는 조병창을 접수한 미군 부대 근로자, 미군이 철수한 후에는 민간 공장 근로자들이 들어와 살았다.




서울 권역에는 영등포구, 동작구, 인천 부평구에 각각 1,000여 호의 영단주택이 건설됐는데 이 중 당시 모습이 온전히 남아있고 최근까지 본래의 용도인 ‘주거지’로 쓰인 곳은 부평 산곡동 단지가 유일하다. 동작구 상도동, 영등포구 대방동의 단지는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영등포구 문래동 단지는 ‘문래창작촌’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소규모 공장, 음식·주점, 커피전문점 등이 혼재해 있고 주택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덕분에 수십 년 전에 작성된 도면·기술과 비교해 봐도 흐른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정문 바로 옆에 설치된 화장실, 단차가 있는 주방과 마루, 주방 위로 길게 뚫린 다락, ‘ㄷ’자 건물 사이로 뻥 뚫린 안마당 등을 여러 세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집의 소유권이 여러 번 손바뀜되었지만 대를 이어 동네에 살아온 이들도 적지 않다. 재개발이 진행돼 철거가 한창인 이곳에 마지막까지 남은 최씨도 이곳에 살던 부모님에게 태어나 본인도 자녀 둘을 낳아 키운 토박이다. 미군, 노동자가 한데 엉켜 붐비던 시절부터 주민들끼리 얽히고 싸우고, 어울리고 살고, 하나둘 떠날 때까지의 감정이 생생하다고 한다. 최씨는 이곳을 두고 "눈물, 기쁨 다 있었던, 내 인생이 있던 동네”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미군정, 산업화 등 근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이 동네가 빚어졌듯 최씨도 동네의 역사 속에서 빚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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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이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