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설가 윌리엄 개스에 따르면 목록(list)은 유서 깊고 창조적인 문학 양식이다. 그는 '파랑에 관하여'에서 파랑의 목록을 책 한 권 분량으로 써 내려갔다. 파란 연필(blue pencil), 파란 코(blue nose), 파란 영화(blue cinema), 파란 법(blue law), 추위와 피멍과 멀미와 공포의 영향하에 있는 피부의 납색과도 같은 색조, 파란 파탄(blue ruin)이라고 불리는 싸구려 럼이나 진, 그 술들로 인해 나타나는 파란 악마들(blue devils)······. 끝도 없이 파랑의 사물들이 이어진다. 파란 연필은 교정용 필기구, 파란 코는 점잖은 체하는 사람, 파란 법은 엄격한 법률을 뜻한다. 파란 파탄은 철저한 파멸을 말한다고 하니 이런 이름의 럼주나 진을 마시면 생이 완전히 파탄날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술들을 멀리하면 금단증세로 파란 악마라고 불리는 알콜성 우울증이 찾아온다고 한다.
시인들은 목록의 단순한 양식이 주는 기쁨을 잘 알고 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즐거움'을 보라. “아침에 처음으로 창밖 내다보기/ 다시 찾아낸 오래된 책/ 감격에 겨운 얼굴들/ 눈, 계절의 바뀜/ 신문/ 개/ 변증법/ 샤워, 헤엄치기/ 옛 음악/ 편안한 신발/ 이해하기/ 새로운 음악/ 글쓰기, 어린 식물 심기/ 여행하기/ 노래하기/ 친절하기” 아! 즐겁다. 그저 나열한 걸 읽었을 뿐인데 이 시인과 친해진 느낌이 든다. 옛 음악 듣기를 즐거워하고 새로운 음악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그에게 호감이 간다. 하지만 신문은 왜? 나라면 신문은 슬픔이나 분노의 목록에 넣었을 텐데···.
세상에는 기쁨을 주는 복잡한 양식도 있다. 그러나 지쳐 있을 때는 단순한 반복이 안정을 준다. 이런 안정감은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경험한 엄마의 심장 소리에서 연유한다는 견해가 있다. 목록을 쓰면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이 원초적 리듬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록 작성에 능통한 작가들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백석(1912~1996)이다. 그처럼 목록을, 문학용어로 말하자면 열거법을 잘 활용한 시인도 없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갖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 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돈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 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동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모닥불' 전문
첫 연은 모닥불 속에서 타는 것들의 목록이다. 쌀쌀한 밤에 새끼줄, 헌신짝, 소똥, 가죽신 바닥에 댄 창, 개 이빨, 널빤지, 지푸라기, 닭 깃털, 솜털이 불꽃을 태운다. 둘째 연은 모닥불 주위로 모여든 이들의 목록이다. 향촌의 높은 어른, 초시에 급제한 양반, 더부살이 아이가 높낮이 없이 둘러앉는다. 새로 내 식구가 된 사위와 아직 어려운 새 사돈, 주인과 객이 구분 없이 오손도손. 그 틈새로 큰 개도 슬그머니 들어오고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끼어든다. 존재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시가 된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소설가 조르주 페렉은 목록 작성은 실제로 해보면 복잡한 일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빼먹는 항목이 생기고 작성을 곧 포기하고 싶어지거나 대충 끝내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몇 단어 열거하다 보면 금세 ‘기타 등등’이라고 써버리게 된다. “하지만 ‘기타 등등’이라고 쓰지 않는 것이 목록 작성의 핵심이다.” 오랜 무명 생활 끝에 상을 타는 배우가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긴 감사의 목록을 읊는 상황을 떠올려보라. 그는 단 한 사람의 이름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만일 누군가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을 잊는다면 그거야말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돕고 지켜온 그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극도로 무례한 증거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나열할 목록이 아무리 길어도 소중한 존재들의 이름은 기타 등등으로 생략되지 않는다.
'모닥불'처럼 단순한 시가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도 잊지 않고 모든 것을 호명하는 사랑의 단순함. 그 성실한 단순함. 이 시가 새끼줄과 헌신짝 기타 등등을 태우고 재당과 어른과 초시 양반 기타 등등이 둘러앉은 모닥불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는 것. 하찮게 취급되는 것들까지 전부 호명하는 다정함 덕분에 세 번째 연이 나올 수 있게 된다. 우리 할아버지는 부모를 잃은 데다 추위로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다 없어진 몽동발이의 고아였는데도 살아남았다. 갈 데 없는 고아를 위해 불 옆에 잠시 한기를 녹일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남지 못했다면 슬프건 그렇지 않건 간에 역사로 전해질 이야기조차 없을 테니 모닥불 덕분에 슬픈 역사도 있는 것이다.
백석 연구자들에 따르면 시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초의 농촌에서는 모닥불을 피우는 일이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혼례나 장례를 치를 때나 전쟁으로 피란을 떠나는 길 위에서 온기가 필요할 때 모닥불을 지폈다. ‘새사위’나 ‘갓사돈’과 같은 단어들은 이 모닥불이 혼례가 있는 앞마당에서 타오르고 있음을 알려준다. 서러운 어린 날을 거쳐 왔지만 이제 일가를 이루고 자손의 결혼식을 치르는 할아버지의 훈훈한 인생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이 숨은 서사를 알아채지 못한다 해도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큰 문제가 없다. 시인은 조부의 자수성가를 부각시킬 의향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하는 마음의 층위에서는 흥하든 망하든 중요한 게 아니다. ‘붓장사’도 ‘땜장이’도 ‘우리 할아버지’도 사나운 세월을 무사히 버틴 후에 여기에 존재하는 슬픈 역사를 가진 이들일 뿐이다. 항상 세상을 그리 보아서 그런 것일까? 백석은 영어와 일어와 러시아어에 능했고 수입된 새 문학 사조들도 잘 알던 모던 보이였지만 시적 야심은 크지 않아 보인다. “걸작을 쓰겠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취한 사람이나 죽어가는 사람의 귀에 속삭여줄 수 있는 말이면 된다”고 에밀 시오랑은 말했다. 백석도 그런 것 같다.
어떤 시인들은 시 속에 죽어가는 이의 가쁜 숨소리를 담아낸다. 읽은 이의 가슴을 찢는, 고귀한 시들이다. 그러나 백석의 시에선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큰 비명이나 고통스러운 신음은 들리지 않는다. 다만 그는 죽어가는 사람, 피로와 고통과 절망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사람 곁에서 속삭이며 중얼거리듯 쓴다. 그 중얼거림에 삶의 깊은 성찰이나 낙원의 약속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린 시절에 마을의 무당 할머니 집에서 맛보았던 나물 이름 따위. 그는 아래쪽 젖은 땅에서 캐어낸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두릅순 회순 산나물”로 만든 무침들과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에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하며 적어간다('가즈랑집'). 또는 함께 국수 삶아 먹던 풍경 속에 담긴 사물들의 이름을 부른다. 이 별것 아닌 것들을 세다 보면 어느덧 누군가의 절망적인 시간이 지나가고 공포도 불안도 덜어진다.
나는 한 권으로 된 '한국문학 대표시인 선집'을 열심히 외우며 10대를 보냈다. 그런데 먹는 것을 몹시 좋아했던 내가 음식 이름으로 가득한 백석의 시를 읽은 기억이 없다. 당연하다. 80년대 중반에 나온 책들에는 그의 시가 실려 있지 않았으니까. 북쪽이 고향인 백석은 해방을 맞아 월북했다. 정확히 말하면 고향집으로 돌아갔다. 어학 천재였던 그는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의 부탁으로 김일성 환영 행사에서 러시아어 통역을 맡은 적이 있고 터키의 사회주의자 나즘 히크메트의 시집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 월북 이력 때문에 백석 시집은 출판금지 되었다가 1988년에야 해금되었다. 독립투사의 이력도 문제 삼는 시절이다. 실체 없는 이념 공세로 오래전 사라진 금서 목록이 또 생겨날까 봐 두렵다.
*윌리엄 개스와 조르주 페렉의 문장들은 브라이언 딜런의 '에세이즘'(김정아 옮김· 카라칼 발행)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