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만 입나요?...반팔 저고리에 레이스 치마 파는 '120년 된 한복집'

입력
2023.09.29 10:00
'국내 최대 한복 상가' 광장시장 가봤더니
명절 간소화, 코로나19로 한복 매출 급감
반팔 저고리에 지퍼 치마...'디자인 한복' 
외국인 관광객·MZ세대 겨냥 일상복으로

"명절이라고 요즘 누가 한복을 입나요?"

추석을 사흘 앞둔 26일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 1층 한 한복집 직원이 되물었다. 광장시장은 120년 전통을 자랑하는 주단 한복부를 비롯해 수십 개의 한복집이 밀집한 국내 최대 한복 상가다. 한때는 1,000여 개의 한복집이 있었지만 지금은 100여 곳만 남았다. 다가온 명절에도 시장은 한산했다. 비혼과 저출생, 명절 간소화 등의 영향이다. 최근 3년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비대면 명절' '작은 결혼식'이 자리잡으면서 한복을 찾는 이들은 더 줄었다.

팔리는 한복은 따로 있다. 한복을 명절이 아닌 평소에 입으려고 사는 이들도 생겼다. 광장시장 1층 한복집 통로에는 집집마다 화려한 무늬의 천과 레이스 등으로 지은 원피스 한복, 지퍼를 달아 입기 편하게 만든 치마, 반팔 저고리, 대님(한복 바지 부리를 여미는 끈) 대신 고무줄을 넣은 바지 등 파격적인 디자인의 한복들이 줄줄이 걸려 있다. 한복 장인들은 "일상에서도 편하게 누구나 입을 수 있는 '디자인 한복'으로 전통을 잇겠다"고 입을 모았다.

한복, 명절·결혼 때 안 입는다

한복 장사는 명절 때나 혼수철이 주로 대목이었다. 광장시장 2층에도 예복으로 맞추는 전통 한복집들이 모여 있다. 37년간 가업으로 한복을 판매해 온 이모(59)씨는 "20년 전만 해도 명절 때마다 가족들이 모이니까 한복을 맞춰 입었고, 결혼할 때도 양가 부모와 친인척들이 한복을 하러 왔었다"며 "하지만 요즘은 명절에 다들 해외여행 가고, 결혼할 때도 부부 10쌍 중 8쌍은 한복을 안 입는다"고 달라진 세태를 전했다.

광장시장 2층 터줏대감 진선미주단의 권동희(86)씨는 "60년 가까이 장사하면서 전통 한복이 이렇게까지 낙후한 옷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다""예전엔 한복이 귀해서 못 입었는데, 요즘엔 입을 일이 없어서 안 입는다고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명절·혼수철 특수가 사라지면서 매출도 크게 감소했다. 한 한복집 관계자는 "설이나 추석 등 명절에 한복을 입지 않는 분위기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결혼식에서도 폐백과 한복을 모두 생략하는 경우도 많다"며 "특히 코로나19 이후 매출이 70%가량 줄었다"고 했다.

원피스 한복, 반팔 저고리...'디자인 한복' 각광

한복 상인들은 변화에 발 맞춰 디자인 한복을 선보이고 있다. 기존에 치마 단을 줄이거나, 순면 등 원단을 바꿔 편안하게 만든 개량 한복 수준을 뛰어넘어 무늬와 패턴, 장식 등 다양한 디자인을 가미한 '디자인 한복'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광장시장에서 디자인 한복을 판매하는 안모(63)씨는 "사람들이 한복이 불편해서 안 입는다고 하니까, 한복 디자인을 현대식으로 바꿔 왔다"며 "처음에는 작은 자수 같은 디자인을 넣었다가, 몇년 전부터는 치마와 저고리가 아니라 아예 원피스나 드레스처럼 과감하게 패턴을 바꾼 한복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복을 찾는 이들도 다양해졌다. 특히 블랙핑크와 방탄소년단(BTS) 등 국내 유명 아이돌그룹이 세계 무대에서 디자인 한복을 입고 주목을 받으면서 외국인 관광객 등도 한복을 찾고 있다. 안씨는 "예전에는 아이와 부부 등 가족 단위 손님이 많았지만, 요즘에는 주로 외국인과 젊은 세대들이 한복을 사러 온다"며 "SNS에서 유명인이 입고 화제가 된 한복을 찾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해외여행 가서 입으려고 한복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한 한복집 대표는 "지난해 70대 노부부가 저희 매장에서 한복을 맞춘 뒤 카타르 월드컵에 응원하러 가셨다"면서 "우연히 TV를 보는데 중계 카메라에 그 분들이 잡힌 걸 보고 깜짝 놀랐지만 한편으론 굉장히 뿌듯했다"고 했다.

한복 대중화가 전통 문화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크다. 10여 년 간 한복집에서 일한 김모(52)씨는 "한복 명칭을 몰라서 저고리 고름을 리본이라고 하는 젊은 손님들도 꽤 있다"면서 "한복을 자주 입고 접하다 보면 자연스레 전통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민족 전통 의상인 한복이 잊혀져, 나중에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가 되면 안 된다"고 우려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도 "우리가 스스로 전통 의복을 아끼고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며 "설과 추석 명절, 1년에 딱 두 번만이라도 한복을 입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국내외로 우리 문화를 알리는 효과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희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