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최대 스타트업 행사 '테크크런치 디스럽트'가 열린 19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 무대에 선 리드 잡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내가 숙연해졌다. 그가 왜 그런 꿈을 갖게 됐는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2011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애플의 공동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의 네 자녀 중 하나다. 리드 잡스는 12세가 되던 해 아버지의 암 진단 소식을 접했고, 스탠퍼드대 재학 중이던 20세에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이날 리드 잡스는 스타트업 투자가로서 행사장을 찾았다. 그는 지난달 암 치료법을 연구·개발하는 스타트업, 기관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벤처캐피털(VC) '요세미티'를 차렸다. 지금까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으로부터 2억 달러(약 2,660억 원)의 투자금을 모았다. 잡스는 직접 치료제 개발 회사를 세우는 대신 투자하는 일을 택한 데 대해 "(유망한 업체들을 찾아 지원하는 일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암 환자들이 커다란 변화를 느끼게 하고 싶다"고 했다.
이날 개막한 테크크런치 디스럽트엔 리드 잡스와 함께 전 미국프로농구(NBA) 슈퍼스타 샤킬 오닐도 연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언뜻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이 둘을 한데 모은 키워드는 '스타트업 투자'. 최근 나란히 투자자로 변신한 이들은 세계 각국에서 모인 업계 관계자들에게 스타트업 지원에 나선 까닭을 털어놨다. 구체적 내용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꿰뚫는 메시지가 있었다. "우리 삶과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어서"라는 것이었다.
오닐은 이날 자신이 주요 투자자로 참여한 에드소마(Edsoma)의 카일 월그린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마이클 조던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농구스타답게 오닐을 보려는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도 넘쳤다.
그가 투자한 에드소마는 인공지능(AI) 기반 교육 플랫폼 개발 업체다. 책을 읽어 주거나 올바른 발음으로 읽는 것을 도와주는 등의 방식으로 아이들이 글을 깨칠 수 있게 하는 서비스를 만든다.
오닐은 "1998년쯤 한 콘퍼런스에서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창업자)라는 아름다운 대머리의 남자가 '무언가에 투자하면 사람들의 삶이 바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며 "그 후 삶에 변화를 줄 일에 투자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글쓰기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데 대해선 "읽고 쓰는 능력이 어린이뿐만 아니라 수감된 사람들에게도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며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쳤더니 재범 가능성이 87%에서 18%로 현저히 낮아졌다는 한 연구 결과를 언급했다.
매년 열리는 테크크런치 디스럽트는 전 세계 스타트업들이 자사를 홍보하고 투자를 유치하는 행사로 올해는 지난해와 비교해 연사들이 화려해졌을 뿐 아니라 참가 기업도 크게 늘었다. 스타트업 투자가 급감했던 지난해에는 250여 기업만이 전시 부스를 차렸으나 올해는 350여 개로 40%나 늘어 업계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줬다. 행사 첫날인 이날은 오전부터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린 탓에 행사장에 입장하는 데만 두 시간 넘게 걸렸다.
헬스케어·우주·지속가능성 등 분야별로 나뉜 전시장에서 가장 많은 인파가 북적인 건 'AI' 구역이었다. AI 구역에만 가장 많은 40여 개 기업이 부스를 꾸렸고 다른 구역의 스타트업들 역시 자사가 어떻게 AI를 활용하고 있는지 중점적으로 알렸다. 학습, 구직, 법률, 쇼핑 서비스뿐 아니라 이민 지원, 중고물품 판매, 동물 개체 인식에 이르기까지 AI가 접목된 다양한 서비스들이 눈길을 끌었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한 참가자는 "올해 기술 업계는 AI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15개 스타트업이 '한국' 구역을 채웠다. 참가를 지원한 코트라 관계자는 "일본, 벨기에 등 6개 참가국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