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일 참 시원하게 하는” EU

입력
2023.09.19 16: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애플이 지난주 공개한 아이폰15 시리즈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USB-C(C타입) 충전단자였다. 그간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부분 스마트폰 업체들이 C타입을 채택한 것과 달리 애플은 독자 규격(라이트닝 8핀)을 고집해왔다. 애플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홍보한다. “여러 종류의 케이블을 써야 했던 번거로움, 이제 안녕입니다.”

□ 하지만 애플의 자의는 아니다. 유럽의회는 지난해 10월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 충전단자를 2024년 말부터 C타입으로 표준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유럽에서 제품을 팔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해야 했다. 라이트닝 단자가 적용된 주변 액세서리를 비싼 돈을 내고 사용하던 기존 제품 사용자들로선 뒤통수를 맞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한 유튜버는 “애플이 C타입을 빨리 도입 안 해서 소비자들에게 민폐를 끼쳐 놓고 너무 천연덕스럽게 홍보한다”고 비판했다.

□ 유럽연합(EU)이 밝히는 법안 의결 이유는 “폐기물을 줄이고, 소비자의 삶을 더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충전 케이블을 통일하면 연간 2억5,000만 유로(약 3,530억 원)의 충전기 구매 비용, 그리고 1만1,000톤 규모의 폐기물을 줄일 수 있다고 봤다. 다양한 종류의 충전 케이블을 집 안에 쌓아두고 이리저리 맞춰봐야 했던 소비자들로서는 이제 C타입 하나면 모든 충전을 해결할 수 있게 되니 그렇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SNS에 “지난 10년간의 전기제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진보”라며 “가끔 EU가 옳은 일을 참 시원하게 한다”고 적었다.

□ EU 배터리법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6월 의회를 통과한 배터리법은 ‘휴대용 기기 배터리를 소비자가 쉽게 제거하고 교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디자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대로면 스마트폰 제조사는 유럽에서 과거처럼 배터리 탈착형 모델만 팔 수 있다. 아직 적용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다. 제조사들은 일체형 스마트폰이 슬림한 디자인과 방수 등을 위한 것이라 내세우지만 교체 시기를 앞당기기 위한 정책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스마트폰을 통째 바꿔야 한다. 제조사들로선 곤혹스럽겠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또 한 번 "생큐, EU"를 외쳐야 할 수도 있겠다.

이영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