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61) 감독은 한국 영화 최고 흥행술사 중 한 명이다.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1996)로 한국 영화의 부흥기를 알렸고, ‘쉬리’(1999)와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 흥행 역사를 새로 썼다. ‘마이웨이’(2011)는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 성적(214만 명)을 기록했으나 강 감독은 여전히 행보를 주목해야 할 영화인이다. 그는 추석 연휴를 겨냥해 신작 ‘1947 보스톤’을 27일 선보인다. ‘장수상회’(2015) 이후 8년 만의 영화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영화사 엠메이커스 사무실에서 강 감독을 만났다.
‘1947 보스톤’은 ‘1947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이라는 간략한 문장으로 회자되곤 했던 국내 스포츠 역사 한 자락을 불러낸다. 해방 직후 혼란기 베를린올림픽 영웅 손기정(하정우)과 남승룡(배성우)의 지도로 세계를 놀라게 한 서윤복(임시완) 선수 사연이 스크린에 펼쳐진다. 현대사를 배경으로 격정의 이야기를 강약 있게 조율해내는 강 감독의 연출력이 인상적이다.
강 감독은 이미 쓰인 각본에 대한 연출 의뢰를 받고 ‘1947 보스톤’의 메가폰을 잡았다. “원래 마라톤 소재에 관심이 컸던” 그로서는 “다른 감독이 맡았으면 아쉬움이 많았을 내용”이었다. “국내 마라톤의 전설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 세 분을 동시에 영화에 담을 수 있고, 좌절과 고통의 역사가 아닌 승리의 순간을 관객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 감독은 “실화가 워낙 극적이라 허구를 최대한 자제했다”며 “실제와 일치율이 80% 정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윤복을 연기하기 위해 임시완은 5개월 동안 마라톤 훈련을 했다. 국내 여자마라톤을 대표했던 권은주 감독이 지도했다. 임시완은 10㎞ 단축마라톤 출전을 하기도 했고, 영화 촬영 중에도 훈련을 지속했다. 강 감독은 “임시완이 진짜 서윤복이 되지 않으면 영화는 실패한다”고 생각했다. “관객은 서윤복이 달리는 장면에 집중할 텐데 배우가 마라톤 선수 같지 않으면 몰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강 감독은 “임시완은 근육 모양, 체지방 비율 등도 서윤복 선생님 원형에 가깝게 몸을 만들면서 혹독한 훈련까지 받았는데 잘 견뎌줬다”고 돌아봤다.
영화의 절정은 1947년 4월 19일 열린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장면이다. 강 감독은 “마라톤은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1940년대 보스턴을 스크린에 재현하기 위해 호주 멜버른 인근에서 촬영했다. “라트비아와 폴란드, 헝가리, 우루과이, 뉴질랜드 등을 돌아본 후 찾아낸 곳”이었다.
“3부작이 나올 만한 내용”인데도 강 감독이 처음 구상했던 상영시간은 110분. 실제 상영시간은 108분이다. 강 감독이 그린 밑그림대로 찍고 편집한 셈이다. 강 감독은 “제작비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여러 가지를 보여주면서도 무엇에 집중할지, 강약조절은 어떻게 할지 촬영 전부터 정해놓았다”고 말했다. ‘1947 보스톤’의 제작비는 210억 원이다.
촬영은 2019년 9월 시작해 2020년 1월 마쳤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개봉 시기를 미뤄왔다. 강 감독은 “개봉하기까지 긴 기다림이 있었으나 후반작업을 좀더 촘촘히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위안 삼고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한국 영화계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다. 올해 7~8월 여름시장에선 한국 영화 관객이 지난해보다 500만 명 이상이 줄었다. 한국 영화 산업화를 견인했던 강 감독은 고민이 많다. “그동안 한국 영화는 한국 관객이라는 제한된 영역을 정해놓고 만들어졌어요. 이제는 무한경쟁시대입니다. 관객은 한국 영화라는 이유로 돈을 내지 않아요. 미국이든 유럽이든 어디 영화와 견주어도 더 볼 만한 무엇을 만들어야만 해요. 예전 어떤 위기보다 더 큰 위기입니다. 영화인의 혁신이 절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