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전후 유럽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건반 악기인 하프시코드와 같은 시기 조선 선비들이 즐기던 정가 가곡 연주가 마치 본래 한 몸이었던 듯 어울렸다. 16일 오전 10시 전북 전주시 전라감영 선화당에서 열린 '풍류뜨락'은 세련된 한국적 서정미가 가득한 무대였다.
여창가객 강권순이 정갈한 소리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뽑아내는 느린 곡조의 전통 성악곡 가곡과 국악기 양금과 닮은 소리를 내는 하프시코드, 거문고, 대금, 단소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조합에, 한옥 대청마루를 꽉 채운 관객들은 특별한 순간을 담고자 휴대전화 카메라를 손에서 좀처럼 놓지 못했다. 우천으로 조선시대 전각인 전주 경기전에서 전라감영으로 무대를 옮긴 '풍류뜨락'은 2001년부터 전북 전주시에서 열려 온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올해 '국악 르네상스의 촉매'로의 변신을 선포하면서 새롭게 기획한 마티네(낮 공연) 프로그램의 일부다.
'상생과 회복’을 키워드로 11개국이 참여해 89개 프로그램, 108회 공연에 나서는 제22회 전주세계소리축제가 15일 개막해 열흘간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전주한옥마을, 전북 14개 시·군에서 펼쳐진다. 전통음악을 중심으로 월드뮤직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아우르는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전북의 대표적 축제지만 지역 축제의 굴레를 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클래식 애호가이자 국악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잘 알려진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이 조직위원장을 맡고, 음악인류학자인 김희선 국민대 교양대학 교수가 집행위원장을 맡은 올해는 전국화, 세계화를 도모하는 첫 행사로 관심을 모았다.
당장 관객부터 달라졌다. 15일 저녁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열린 개막 공연에는 전주시민뿐 아니라 서울의 클래식계 관계자와 주한 외교사절 등이 바이로이트·글라인본 페스티벌 등 세계적 음악 축제의 시스템을 본뜬 '소리축제열차'를 타고 공연장을 찾았다. 축제 주제인 '상생과 회복'을 타이틀로 내건 개막 공연은 '우리 소리의 세계화'를 선언하는 상징적 자리였다. '서양음악의 토착화'를 그 첫걸음으로 삼아 전통음악에 국한하지 않고 민요, 창작 오페라, 위촉 창작곡 등 다양한 한국 음악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자칫 부조화스럽게 들리기 쉬운 국악과 양악의 만남은 '서양오케스트라의 한국적 수용'이라는 모토로 개작과 위촉 초연곡을 선보임으로써 전통음악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발산되게 했다. 개작 초연곡으로 장대한 스케일이 돋보인 25현 가야금 협주곡 '바람과 바다'는 본래 있던 곡처럼 조화로웠다. 전통 타악기인 장구와 꽹과리, 징이 중심이 되는 동해안 별신굿의 장단과 선율을 재료로 한 김성국 작곡의 국악관현악곡을 서양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개작한 작품이다. 위촉 초연으로 최우정 서울대 작곡과 교수가 남도 민요인 '거문도 뱃노래'를 중심으로 오펜바흐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의 '뱃노래'와 과테말라 뱃노래 등 6곡의 동·서양 뱃노래를 모티브로 한 사중창곡 '꿈'에서는 소프라노 서선영과 바리톤 김기훈, 소리꾼 고영열과 김율희의 목소리가 여러 언어가 뒤섞인 가사와 함께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이번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4년 만에 전면 대면 축제로 열리게 된 만큼 원로 명창(김수연·김일구·신영희·정순임·조상현)들이 제자들과 함께하는 '국창열전 완창판소리'를 비롯해 장한나가 지휘하는 디토 오케스트라와 미샤 마이스키 첼로 협연, 사제지간인 피아니스트 김대진과 박재홍의 무대, 경기민요 소리꾼 이희문의 '이희문 오방신과 춤을!' 등 각 장르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공연이 풍성하게 이어진다.
이왕준 조직위원장은 "축제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지만 미흡했거나 보충했으면 하는 각계 의견을 모아 여러 변화를 시도했다"며 "축제가 전주라는 공간, 무대와 공연장을 넘어 전국화·세계화를 향해 한 단계 도약함으로써 국악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