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할퀸 골프장 사업··· 다랑이논 마을 수도꼭지서 흙탕물이 나온다

입력
2023.09.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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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다랑이논 마을' 뒤로 27홀 골프장 사업 전개
굴착기 다녀간 뒤 쑥대밭 된 숲··· 상습적 토사 유출
'지역경제 발전 위한 사업' vs '삶의 토대 사라지는 게 발전?'


지리산 서편으로 뻗은 산줄기는 노고단(1,570m)을 시작으로 종석대(1,360m)와 시암재(1,000m), 간미봉(728m)을 지나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아래로 스민다. 그중 구례군 산동면에 접하는 서북쪽 산기슭 경계면에는 다랑이논이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비탈을 따라 계단 형태로 층층이 떨어지는 이곳의 논배미들은 산수유 군락과 함께 고유한 인문경관을 구성한다. 산동면 안에서도 사포마을은 경관이 수려하고 다랑이논을 중심으로 농경문화가 잘 보전된 곳으로 꼽힌다.

‘큰골, 냉골, 바른골, 종골, 큰번데기골, 애정골, 구골.’ 예부터 물이 깨끗하고 풍부해 마을과 연결된 계곡마다 구전으로 내려온 명칭이 존재하는데, 마을 어귀에서 만난 80대 어르신들은 그 이름들을 줄줄이 호명했다. 대대로 주민들은 지리산 계곡에서 내려온 물을 마셔왔다. 그 물로 다랑이논의 모를 길러냈고, 수확 마친 볏짚으로 소를 먹였다. 가축 분뇨는 퇴비로 만들어져 다시 논밭으로 돌아가 농토를 비옥하게 했다. 사포마을의 경관은 이러한 자원 순환의 표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도록 이어온 순환 고리에 균열이 생긴 것은 지난 3월이다. 산나물 따러 산에 올랐던 주민들은 기막힌 광경을 목격한다. 빼곡했던 숲은 온데간데없고 골짜기마다 올라앉은 굴착기가 온 산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 마을사람들은 이에 관한 어떤 고지도, 통보도 받지 못했다. 현장 관계자는 “재선충 감염에 취약한 소나무를 베고 편백나무를 심는 작업이다”라고 설명했지만, 그들 주변으로 잘린 편백나무가 나뒹굴고 있었다. 박현무(58) 사포마을 이장은 “군청에 확인해 봤더니 마을 뒷산 21만㎡에 이미 벌채 허가가 나 있었다”면서 “놀랍게도 구례군이 나무가 베어진 지리산 줄기에 150만㎡ 규모의 골프장 조성을 추진하는 업무협약까지 마친 상태였다”라고 말했다.

민둥산으로 변한 이곳은 지리산국립공원 경계로부터 불과 170m 떨어져 있으며 생태·자연도 1등급 지역을 포함한다. 박 이장은 “허가 사항과 달리 싹쓸이하듯 모든 나무를 벴고, 산 한가운데를 잘라 길을 내고, 지형을 맘대로 변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허가 기간이 지나서도 벌채가 지속됐고, 허가받지도 않은 지역에서 무단으로 나무를 베는 것을 보다 못해 고발하기에까지 이르렀다고” 밝혔다.


올여름 이 지역엔 유독 많은 비가 내렸다.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장마 기간(6월 23일-7월 26일) 광주·전남에 내린 비는 765.5㎜로 집계됐다. 광주·전남 평균 강수량 측정이 가능해진 1973년 이후 가장 많은 양이다. 지난 6일 찾은 벌목 현장에서는 강우로 인한 토양 유실이 광범위하게 관찰됐다. 벌거벗은 산비탈과 임도 경사면마다 물길이 나 있었는데, 그 깊이가 성인 남성 허리춤까지 이르는 경우도 보였다. 표면에 드러난 모래질의 토양에서는 멧돼지, 고라니 등 야생동물의 발자국이 보였다. 재선충으로 인해 통나무 자체로는 반출이 불가해 전량 분쇄 처리됐는데, 현장에는 여전히 나뭇조각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지난 7일 정오 마을회관에서 만난 주민들은 “산골짜기를 파헤친 뒤로 수도꼭지에서 붉은 흙탕물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성토했다. 대부분 팔순을 넘긴 이들은 하나같이 신원이 밝혀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는데, “지난 2004년 9월 14일, 같은 자리에서 골프장 조성이 추진됐을 당시 반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십 명의 괴한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 뒤 생긴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김순호 구례군수는 지난 5월 11일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산동 온천 골프장 사업은 침체한 산동온천지구를 살리고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필수적인 사업"이라면서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매김한 골프는 지역에 경제·사회적으로 미치는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라고 골프장 사업 추진 의지를 분명히 했다.

사포마을 주민 전경숙(61)씨는 “기후위기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국립공원을 파헤쳐 골프장으로 개발하는 일이 어떤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리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면서 “후손들에게 올곧게 물려줘야 할 지리산이 한낱 한탕주의 제물이 되는 걸 보고 있으면 서글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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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에겐 말을 타고 달리다 '멈칫' 말을 세우고 내려 뒤를 돌아보는 오래된 의식이 있었습니다. 발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상윤의 멈칫]은 치열한 속보 경쟁 속에서 생략되거나 소외된 것들을 잠시 되돌아보는 멈춤의 시간입니다.
구례= 하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