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우릴 버렸다"… '골든타임' 지난 모로코, '절망'이 '분노'로

입력
2023.09.12 21:00
12면
사망자 2862명까지 늘어... 실종자는 '비공개' 
'역대급' 지진에도 '역대급' 미흡한 모로코 정부
국제사회 손길 거부까지... 커지는 국민들 분노

대지진 참사를 겪은 모로코 국민들의 절망이 분노로 바뀌고 있다. 특히 생존 확률이 높은 '골든타임' 72시간이 지진 발생 나흘째인 11일 밤(현지시간) 지나면서 "국가가 우리를 버렸다"는 절규도 커지고 있다. 정부가 생존자 구조 및 피해 회복 지연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탓이다. 아직까지도 구조 손길이 닿지 않은 지진 피해 지역은 여전히 수두룩하다.

그래서인지 모로코 당국은 실종자 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구조 작업이 지연될수록 인명피해가 더 커질 건 자명한데도,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국제사회의 구조대 파견 제안도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정부의 방치 속에 건물 잔해를 맨손으로 직접 파헤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지만, 기적을 실현하기엔 역부족이다. 모로코 내무부가 공식 발표한 사망자 수는 어느새 2,862명으로 늘었다. 부상자도 2,562명에 달한다.

시신 냄새 가득한 마을... "아무도 우릴 돕지 않는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아틀라스산맥에 있는 작은 마을 타루이스테에는 11일에야 구조대가 처음 도착했다. 지난 8일 오후 11시 11분 지진이 발생한 지 나흘째다. 이곳에 위치한 집 10여 채는 모두 무너져 내렸다. '구조 공백'의 시간 동안, 마을 주민들은 개인 차량을 이용해 직접 시신들을 수습했다. 어머니를 잃은 하산 알 마티는 "아무도 우리를 도우러 오지 않았다. 버림받은 느낌"이라고 했다. 살아남은 이들의 사정도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생존자들은 나무 위에 천을 걸쳐 겨우 햇볕만 막은 채로 절망에 빠져 있었다. 식량, 텐트 등 구호 물품은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인근 타페그하테 마을은 시신이 부패한 냄새로 뒤덮였다. 400명 중 9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지진 피해가 컸던 두아르트니르 마을에서도 참상이 펼쳐졌다. 주민 모하메드 아바라다는 붕괴된 건물 잔해에 9세 딸이 여전히 갇혀 있다면서 맨손으로 벽돌, 나무 등을 60시간 이상 파헤쳤다. 지칠 대로 지친 후인 11일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첫 구조대가 도착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마을 주민들이 "정부가 우리 존재를 거의 모르는 것 같다"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보도했다.


지진 당시 파리 있던 국왕... 국제사회 지원에도 시큰둥

모로코 국민들의 분노는 정부가 자초했다. 정부는 지진이 모로코를 덮친 지 12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대책 회의를 열었다. 명백한 늑장 대응이다. 이는 모하메드 6세 국왕이 지진 발생 당시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었던 사실에서 비롯됐을 공산이 크다. 명목상 입헌군주제지만 사실상 전제군주제 성격이 짙은 모로코에서는 국왕 지시 없이 총리가 국정을 주도하는 일이 거의 없다.

게다가 이후 대응도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모로코 당국의 힘만으로는 구조 및 피해 수습이 쉽지 않음에도, 모로코 정부는 주변국들의 지원 손길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구조인력 등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앞다퉈 밝혔으나, 영국과 스페인 등 4개국의 손길만 제한적으로 받았다. 모로코 정부는 "필요할 때 지원을 요청하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올해 2월 대지진 재앙을 겪은 튀르키예, 시리아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국제사회는 모로코가 자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부각하려고 외부 지원을 한사코 거부하는 게 아니냐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원조 제공 의사를 거부한 건 국가적 참사의 시기에 불필요한 '외교적 냉랭함'의 표출이라는 해석이 많다. 2021년 프랑스가 모로코인 비자 발급을 제한하고, 같은 해 모로코가 단교한 알제리와는 가깝게 지내는 등 모로코의 신경을 거스른 데 대한 앙심을 드러낸 것이라는 얘기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