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회사가 화장품 연구로 수억원 따내... R&D 카르텔 실체는 연구자가 아니었다

입력
2023.09.1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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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역량 없는 좀비기업이 연구 수주
브로커가 계획서·보고서 버젓이 대필
현장 만연한 '위장 R&D'는 도려내야
연구자들 "왜 싸잡아 예산 삭감하나  
정부 전략기술 새로운 카르텔 될 판"


#1. 연간 총매출액이 5억 원이 채 되지 않는 소규모 가구 제조업체 A사는 지난 2020년 수억 원짜리 정부 연구개발(R&D) 사업 과제를 따냈다. 그런데 연구 주제는 가구와 전혀 관련 없는 기능성 화장품이었다.

#2. 정부는 최근 우수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연구개발, 기술사업화, 해외진출 등을 돕는 B사업을 진행했다. 선정된 기업들이 받은 지원금은 각각 2억 원 정도에 그쳤는데, 목표 달성에 실패한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3. 한 산업단지에 입주해 있는 중소 제조업체 C사는 2020년 1억 원 규모의 정부 R&D 사업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C사가 제출한 과제계획서는 브로커가 C사에서 2,000만 원을 받고 대신 써준 것이었다.

12일 국민의힘 과학기술특별위원회에 따르면, 빠르게 불어난 연구개발(R&D) 예산을 노리고 편법적으로 연구과제를 따낸 기업들이 포착되고 있다. R&D를 수행할 능력이 없으면서 이른바 'R&D 기획 브로커'를 '대필작가' 삼아 뚜렷한 결과물 없이 예산만 축내는 식이다. 과기특위는 이처럼 연구 생태계를 갉아먹는 '위장 R&D'를 카르텔로 의심하고 사례를 파악하는 중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역시 이들을 R&D 카르텔의 큰 축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대다수 연구자들이 위장 R&D와 큰 연관이 없음에도, 정부가 과학기술계 전반을 카르텔로 몰아세우고 R&D 예산을 대규모로 삭감한 데 대한 반발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위장 R&D를 관리·감독할 최종 책임이 정부에 있어서다. 결국 관료들이 자기 책임을 연구현장으로 떠넘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브로커에 멍든 R&D 현장... 관리 못한 정부 책임 커

과기특위가 파악한 위장 R&D 기업들이 정부 예산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브로커 역할을 하는 연구기획·과제관리업체(이하 기획업체) 덕분이었다. 이들이 대신 작성한 연구계획서나 결과보고서를 이용해 R&D 사업이나 연구과제를 따낸 것이다. 브로커들의 난립은 부실한 관리 체계를 만든 정부에 책임이 있다. 기획업체는 한국연구산업협회에 신고하지 않고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신고된 기획업체는 668곳뿐이지만, 미신고 업체를 포함하면 1만 개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신고 기업이라고 모두 역량을 갖춘 것도 아니다. 이들 기업은 대부분(78.1%, 521개)이 10인 미만 사업장이고, 박사급 인력이 없는 곳이 60.5%(404개)나 된다. 15.6%(104개)에는 석사급조차 없다. 또 이 업체에서 연구비 나눠먹기 등 비위가 적발된다 해도 신고 취소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영업을 중단하게 할 방법이 없다. 즉 양지든 음지든 이렇다 할 규제책이 없는 것이다.

정부로부터 R&D 사업의 관리·평가 역할을 위탁받거나 실제 예산을 집행하는 연구관리전문기관(이하 전문기관)이라도 문제를 잡아야 하는데, 이마저도 제 구실을 못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전문기관들이 2018년 효율화 방침으로 한 차례 정리됐지만, R&D 예산이 급증하면서 최근 40여 개로 불어났다. 과기특위 관계자는 "부처 간 벽이 높아 기관끼리도 과제 정보나 전문가풀 등이 공유되지 않고, 결국 R&D 중복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서 "작은 기관일수록 브로커의 활동이 예산 증대로 직결돼 서로 끈끈해지고 (부정이) 양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귀띔했다.

정부의 최종 감시망도 허술하다. 과기정통부는 전문기관 실태조사를 매년 실시해오고 있지만, 속도가 나질 않는다. 3년째인데 17곳 정도 살피는 데 그쳤다. 또 중소벤처기업부에 2017년부터 2022년 8월까지 접수된 브로커 관련 신고는 40건이었는데, 이 중 처벌은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처럼 부실한 감시 속에 한 중소기업은 중기부, 산업통상자원부를 돌아가며 총 22억 원에 달하는 사업비(과제 11개)를 따냈다.

정우성 과기특위 위원장(포스텍 교수)은 "기획업체가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관리가 안 돼, R&D 역량이 없는 '좀비기업' 운영에 과제비가 다수 사용되는 형국"이라며 "여기에 부실 평가가 더해져 국가 R&D 사업은 늘 성공해왔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위장 R&D를) 걷어낸 뒤 연구윤리 부정·솜방망이 처벌 등 다른 문제점도 개선해, 투자받아야 할 연구자들에게 예산이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기특위는 정부 과제를 기획한 연구자가 실제 예산을 타내 수행까지 하는 등의 부정 사례도 파악 중이다.

빈대 못 잡고 초가삼간 태운 꼴... 과학계 상처 키웠다

문제는 이 불똥이 과학 현장 전반으로 튀었다는 점이다. 위장 R&D 외에 일부 연구자들 사이에서 R&D 예산 나눠먹기 관행이 있었다며 정부는 그 역시 카르텔이라 의심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내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속 정부출연연구기관 25곳의 주요사업비를 평균 25%씩 깎았고, 많은 곳은 30% 가까이 삭감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4대 과학기술원도 주요사업비가 6~14%가량 줄었다. 기초연구 예산은 6.2% 내려앉았다.

연구자들은 정부가 성급하게 과학계를 뭉뚱그려 카르텔로 규정하고 책임을 씌워 예산을 대규모로 삭감했다는 점을 연일 비판하고 있다. 한 기초과학자는 "카르텔을 없앤다, 전략기술에 집중한다는 메시지 때문에 연구자들이 '살아남은 분야'에 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면서 "되레 새로운 카르텔이 생겨나고, 기초과학은 말살당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중견 과학자도 "재정이 어렵다고 이해를 구하거나, 구체적인 문제를 짚는 등 명분을 명확하게 제시했어야 한다"면서 "이런 졸속 행정은 국정 목표인 '자율과 창의로 만드는 담대한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비판이 커지자 정부는 부랴부랴 중소기업 때리기에 나섰다. 주영창 과기정통부 혁신본부장은 최근 기자들을 만나 이번 예산안에서 '중소기업 뿌려주기식' 보조금성 R&D가 많이 줄었다는 점을 설명하며 "능력 없는 중소기업이 컨설팅 회사(기획업체)들로 생존해온 사례가 있던 건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기업을 도태시키고, 건전한 기업에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오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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